by
꿈꾸는작가 나혜옥
Oct 24. 2024
걸어서 세계 속으로, 동유럽
걸어서 세계 속으로, 동유럽
"우와 부다페스트에서 결혼 35주년을 맞다니 신난다. 야호"
"우와 텔레비전에서 본 거랑 똑같다"
여행은 육십 대 부부를 천진난만한 아이로 만든다.
미간에 힘을 주고 성난 이구아나처럼 굳어있던 근육들은 처음 보는 이국적 멋스러움에
무장해제 됐다.
눈앞에 펼쳐진 헝가리 국회의사당의 야경은 14시간의 비행의 노곤함을 풀어주고도 남았다.
"여보, 여보! 동유럽 오길 잘했지"
"마누라 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니까, 호호"
나는 입버릇처럼 퇴직하면 동유럽 여행 갈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언제나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다.
내가 처음 동유럽 여행 갈 거라고 말했을 때 남편은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IMF 때 보증을 서서 공장 문 닫고, 아파트 경매로 넘기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20년 넘게 빚을 갚고 있는 상황에 동유럽 여행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빚을 갚다 지친 어느 날 나는 5년 뒤에 빚청산 끝난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녔다.
빚청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빚 갚기 지쳐있는 남편과 나를 위해서 그냥
큰소리를 쳤다.
집 산다, 땅 산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있어도, 빚청산 한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마 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빚청산은 큰소리친 대로 신기하게 5년 뒤에 이루어졌다.
빚이 없으니 재벌이 부럽지 않았다. 무서울 게 하나도 없었다.
겁이 없어진 나는 노후자금 준비도 안 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직을 했다.
빚 갚느라 고생한 나에게 상을 주고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도 퇴직을 하라고 했다.
남편은 펄쩍 뛰면서 70살까지 일할 거라고 말했다.
남편은 하루라도 일을 쉬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는 일 중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차례 사업실패로 빚 갚기 바빴으니, 일 안 하고 쉰다는 건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일만 하다 죽으면 인생이 너무 불쌍하니, 우리도 건강할 때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하나씩 이루어 보자고 제안을 했다. 끄덕도 안 하던 남편은 반복되는 내 말에 세뇌가 되었는지
어느 날 사표를 냈다. 그러나 사표는 반려되었고 대신 15일 휴가를 얻어 동유럽여행을 떠났다.
이렇게 퇴직하면 동유럽 간다고 큰소리친 것도 이루어졌다.
시작하면 시작이 된다.
세계사 시간 속의 '프라하의 봄'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면서 체코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고,
천문시계의 종이 울릴 때 시계 상단의 12 사도가 내 머리 위에서 회전을 한다. 상상이 현실로
이뤄지는 순간 나는 유럽 속에 서 있음에 전율을 느꼈다.
세계자연유산인 크로아티아의 플로트비체 78m 폭포 아래 물소리가 나를 압도하고,
터번을 쓴 무슬림들이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넬 때 대한민국이란 든든한 백에 콧등이 시큰했다,
슬로베니아의 우뚝 쏟은 '블레드 성'을 TV로 수도 없이 봐 두었던 곳에 내 체취를 남기고,
잘츠부르크 대성당, 모차르트 생가를 내 집 앞마당인양 뛰어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개인적으로 동유럽의 압권은 오스트리아의 실내악과 알프스산맥이었다.
클래식의 문외한에게 소름이 돋게 하고 눈물을 쏟게 한 실내악 연주,
눈앞에 펼쳐진 순백의 거대한 알프스산맥 앞에 우리 부부는 "이야, 이야" 괴성을 지르며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누리는 자유는 여행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다.
내가 여행을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
7박 9일의 꿈같던 동유럽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나는 또 꿈을 꾸기 시작했다
'환갑에는 북유럽 여행 갈 거야'
올해 환갑에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인생 2막은 생각하는 대로 살기로 했고, 생각하니 현실로 이루어졌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선물인 오늘, 이 순간만이 내가 사유할 수 있음을 알기에
과거의 집착도 잊어버리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부부들에게
나는 감히 말한다.
다리가 떨리기 전에, 가슴이 떨릴 때 과감히 떠나라고,
은행에 있는 돈은 숫자이고, 내가 쓴 돈만이 내 돈이라고.
인생 소풍이 끝나는 날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건 추억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