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럽여행기(12)-스위스 빈사(거의 죽어가는)의 사자상

아름답고도 비장한 나라

by 생각전사

2013년 나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적이 있다. 궁전은 아주 화려하고 멋졌다. 거울의 방, 왕과 왕비의 방, 정원 등등. 그 화려함은 프랑스혁명 당시 민중이 왜 분노했는지도 웅변하고 있었다. 나는 궁전을 돌아보다 스위스 용병의 얘기를 듣게 됐다. 당시 왕의 근위대 임무를 수행하던 스위스 용병들은 파리시내 튈르리 궁전으로 몰려온 시민군이 퇴각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이를 거부하고 부르봉 왕가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786명 모두 전사했다는 것이다.


스위스 용병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계약의 이행이었다. 왕가와의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속 뜻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약을 파기하면 어떤 나라도 다시는 그의 후손을 용병으로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과거 스위스는 자연과 기후로 인해 먹고살기 힘든 나라였다. 그래서 스위스 남자들은 다른 나라의 용병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렸다. 그러니 스위스 남자에게 용병이라는 직업은 절박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용병들의 죽음을 불사한 계약이행. 그것은 후손에 대한 사랑을 넘어 국가와 사회유지에 대한 강하고 질긴 신념과 이에 기초한 헌신 같은 것이었다. 아, 참으로 놀랍고도 감동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스위스. 아름다운 경치로 신의 축복받은 나라로만 인식되던 나의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시민혁명군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와 비운의 앙리 앙트와네트 공주가 머물던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들을 끝까지 지키려다 시민혁명군에 의해 몰살당한 용병의 나라, 스위스. 아름답지만 극복해야 할 기후와 지형이 산재한 나라, 스위스. 이런 스위스가 궁금해졌다.


2015년 겨울, 마침내 스위스를 가보게 됐다. 처음 본 스위스의 산과 호수, 계곡, 마을 등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도시는 세련되었고 철도교통은 완벽했다. 도로, 건물, 창문, 표지판, 계단, 하수구 뚜껑, 버스 손잡이, 거리의 의자 등 모든 것이 단순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사각 모양이 유난히 눈에 띄었고 붉은색이 인상적이었다. 천혜의 자연과 인간의 조형물이 아주 잘 어울렸다. 군에 있을 때 주로 다녀본 우리 군의 파병지역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아이티, 오만 등과는 크게 대비되었다.


스위스 첫 방문지 루체른은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도시였다. 유람선은 만년설이 덮인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 만년설로 덮인 높고 웅장한 산. 이 하늘과 산들은 호수에도 비치어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은 에메랄드 색깔로 빛났고,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인양 주위의 모든 걸 담아냈다. 그 위를 삼각형 뱃머리가 조용히 가르며 전진하자 배 뒤꽁무니에서는 하얀 포말의 물보라가 세차게 일었다. 포말이 잦아들며 큰 자국이 길처럼 생겼다가 멀리서부터 사라져 흔적조차 없이 되었다. 공중으로 관광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으려는 수 십 마리 새하얀 갈매기 떼가 오르락내리락 춤추며 배주위를 따랐다.


1시간 남짓한 호수여행 끝에 한 마을의 선착장에 내렸다. 우리는 거기서 리기산 행 톱니 열차를 탔다. 톱니선로는 두 개의 선로 가운데 놓여 있었다. 기차가 그 선로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방금 유람선에서 수평으로 바라보던 풍광이 입체적으로 한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호수는 점점 넓어졌고 산은 점점 가까워졌다. 흰색과 푸른색은 시시각각 햇빛과 어우러지며 천혜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아, 스위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저녁이 되어 루체른 출발지로 다시 돌아왔다. 오랜 비행과 여행에 지친 우리는 우연히 알게 된 한국식당에 가서 김치찌개와 불고기를 배불리 먹고는 첫날의 마지막 일정으로 ‘빈사의 사자상’을 찾아 나섰다. 이미 거리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켜진 어둑어둑한 초행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사자상에 도착했다.


식당의 여종업원이 “가서 보시면 실망할 수도 있어요.”라고 해서 내심 걱정하며 왔는데 아니었다. 나는 사자상이 돌을 깎아 공원에 전시해 놓은 정도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그러나 사자상은 커다란 바위산의 중간 아래쪽을 통째로 파서 조각한 명물이었다. 1821년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트센이 설계하고 독일출신 루카스 야호른이 조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보자마자 감동이 밀려왔다. 때 마침 하늘에 둥그런 달이 떠서 사자상을 비추니 더더욱 신화의 한 장면처럼 되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소설가 이병주의 문장이 떠올랐다.


신화에 물든 달빛 어린 빈사의 사자상. 그 앞으로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하얀 백합이 새겨진 방패를 앞발로 잡은 채 죽어가고 있는 사자의 처연한 표정이 생생하다. 죽음에 다다른 사자, 궁전을 지키다 숨져간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모습이다. 슬픔을 이긴 비장함이었다. 이 사자로 인해 오늘의 스위스가 있는 것이고, 그 후손들이 명예를 잃지 않은 용병으로서 바티칸 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빈사의 사자상을 보며 “여기가 스위스의 심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스위스는 아름답고도 비장한 나라였다. (계속)

스위스 호수와 강
달빛 어린 스위스 빈사의 사자상


keyword
이전 11화유럽여행기(11)-스위스 융프라우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