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끝 ‘일상’, 일상의 일탈 ‘여행’
여행이란 일상을 떠나 새로운 시공간으로의 모험이다. 반복되는 일, 자주 보는 사람, 익숙한 풍경들, 입에 익었지만 조금은 식상한 음식들... 이런 것을 일시 벗어나보는 것이다. 여행은 고루한 일상이 내뿜던 공기를 일순간에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삶의 활력소다. 여행에서 보고 겪은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힘, 한 눈으로만 보던 일상의 사물을 다른 눈으로도 볼 수 있게 하는 힘이 된다. 여느 여행과 마찬가지로 유럽 동그라미 여행도 그랬다.
유럽은 땅도 넓고 기후도 좋았다. 이웃과 이웃은 서로 역사와 서사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전쟁과 민족, 종교와 철학, 경제와 문화, 제국의 융성과 소멸, 영웅의 등장과 퇴장은 한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퍼져나가 서로 충돌하거나 융합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선동가와 야심가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그 과정에서 먼지처럼 일어난 반목과 화해는 영토의 분할과 통합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지식, 이에 기초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 예술과 삶에서의 탈신성화(脫神聖化)는 유럽인을 더욱 인간답고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으니 참으로 경외할 만한 일이다.
여행에서 좋은 것을 볼 때마다 습관처럼 우리나라와 비교되었다. 땅 덩어리도 작고 부존자원도 부족하고 겨레가 반쪽이 되어 서로 전쟁까지 치른 대한민국. 그런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 살게 된 원동력은 무엇일까? 유럽인들이 ‘코리아’를 알아보고 호감을 갖게 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전자는 가난이 죽기보다 싫어 잘 살아보겠다며 이를 악문 한국인의 근성이라고 생각하고, 후자는 그것이 가져온 경제와 문화, 미디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여행은 남을 보면서 나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여행이 주는 선물이다.
2004년 미국 미주리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에서 6개월간 연수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아내, 둘째 아들, 이렇게 셋이 연수 마지막 한 달은 중고 승용차로 자유여행을 했다. 미주리 콜롬비아 시티를 출발해 세인트루이스-애틀랜타-플로리다–키웨스트-뉴올리언스-휴스턴-텍사스-그랜드캐니언-라스베이거스-데스밸리-LA까지 미국 중부와 남부, 서부 10개 주 총 8,000Km를 21일 동안 달렸다. 그 바퀴자국을 연결하면 갈고리 모양이 된다. 숙소예약은 가져간 노트북을 이용해 인터넷으로 했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이라 AAA(자동차보험회사)에서 얻은 지도와 도로표지판을 보며 길을 찾아야 했다. 짧은 영어실력에 순간적으로 표지판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중간중간 월마트에 있는 자동차 정비소에 들러 타이어와 엔진오일, 부품 등을 점검했다. 그때 경험이 이번 유럽 동그라미 여행에 큰 도움이 됐다. 바로 축적의 힘이다.
아쉬움도 있다. 자동차 여행은 주마간산(走馬看山)의 함정이 있다. 구속을 벗어나 자유를 찾는 여행이긴 하지만 사전에 충분한 준비와 관련 지식이 없으면 수박 겉핥기에 먹고 자기 바쁜 여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유럽 동그라미 여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 목적지 가기 바쁘고 시장보기와 먹을 거 해 먹기 바빴다. 그래서 역사문화기행으로써는 충분치 못했다. 여행이라는 게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진 관계로 이런 시간과 공간의 제약, 기회의 한계가 늘 따르기 마련이다. 또한 자동차 이동은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특히 운전을 책임진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역시나 자유에는 책임과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래서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던가. 그럼에도 내게 있어서 자유여행은 패키지여행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데 변함이 없다.
2015년 12월, 겨울 스위스를 자유여행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는 스위스 패스를 사서 철도와 버스를 이용한 여행을 했다. 유스호스텔 회원권을 사서 비교적 저렴한 이 호텔을 주로 이용했다. 운전의 부담이 없으니 빙하특급을 탔을 때도 사진과 영상을 찍으며 풍광을 한껏 즐길 수 있어 좋았다. 2020년 후쿠오카 자유여행도 그랬다. 개별 온천탕이 있고 일본식 전통요리가 제공되는 근사하고 비싼 일본식 숙소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도 자유여행 덕분이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신 절약한 비용으로 고급 숙소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자유여행이 갖는 묘미다. 이 또한 기획하기 나름이니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낸 상품과 같은 패키지여행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여행의 끝은 일상으로의 회귀다. 내 집이 가장 편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고, 지루했던 일상은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최적화된 루틴(Routine)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인간이 왜 자기만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안정감을 느끼는지 돌아보게 된다.
유럽 동그라미 여행을 다녀온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스페인과 일본 오사카 패키지여행, 제주도와 동해안 여행을 몇 차례 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설렘과 일상으로 복귀가 가져다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나는 지금 일상의 편안함을 누리며 유럽 동그라미 여행과 같은 새로운 자유여행을 꿈꾸고 있다. 여행의 끝은 일상이고 지루한 일상의 일탈은 여행이 아니던가.
엊그제 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다. 곧 하얀 겨울이 닥칠 것이다. 겨울을 지나 다가올 새 봄을 생각하니 나이 들어가는 세월의 무상함에 한숨을 짓게 되다가 문득 미소가 절로 난다. 캠핑카를 운전하여 캐나다의 커다란 숲 속 길을 달리는 내가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어디론가 일상의 일탈, ‘여행’을 떠날 것이다. 힘이 닿는 그날까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