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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전사 Dec 15. 2023

뒷모습 랩소디

 인간주체의 환상곡

헤르만 헤세(1877~1962)는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데미안'을 발표했다. 열 살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성장하면서 겪는 치열한 영혼의 기록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를 중퇴하고 시계공이 되었다가 작가가 되어 인도를 여행하고 1차 세계대전의 광기를 경험한 그의 자전적 이야기다. '데미안'은 중세 유럽을 지배한 정신을 넘어 ‘니체’와 ‘조로아스터교’와 ‘인도정신’, ‘찰스 다윈’, ‘구스타프 융’에 닿아 있다.


'데미안'을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 이후 여섯 번 정도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싱클레어가 되었다. 그래서 내 가슴을 두드린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다.”


선과 악, 두 세계에 대한 헤세의 명제는 선으로 일컬어지는 낮의 세계가 밤으로까지 확장되는 출발점이 됐다. 반대로 별은 암흑물질 속에서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그건 빛과 기독교적 가치관을 추구해 온 싱클레어였던 내게 큰 충격이었다.

1919년 초판 표지를 본따 발매된 100주년 데미안 기념판(2019)

여섯 번째 책장을 덮으면서 결국 헤르만 헤세는 ‘싱클레어’ 요, ‘데미안’이자 ‘피스토리우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엄밀히 궁극의 헤세는 ‘피스토리우스’였다는 사실이다.


젊은 시절에는 ‘알’, ‘세계’, ‘깨뜨리다.’, ‘아브락삭스’ 등의 단어에 매몰되었다면 생각의 역사를 탐구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헤세의 번민과 사상을 이해하게 됐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신의 피조물로서의 도구적 인간관과 갈등할 때 내면의 세계를 따라간 주체적 인간의 독백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 그의 꿈은 접었지만 그 꿈이 여전히 머무는 곳에 있는 자, 도덕과 무관하게 ‘바흐 Bach’와 ‘레거 Reger’의 곡을 좋아하며 혼자 빈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자, 내면의 세계 속에 사는 자, 그리스 그노시스파 Gnosticism에 빠져있는 자, 바로 '피스토리우스'였다.


그래서일까, 지금껏 그냥 지나쳤던 한 문장이 머리에 꽂혔다. 나는 이게 결국 헤르만 헤세의 최종 문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전율했다.


“각성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에서 견고해져서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건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나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뒷모습을 내어주며 걷고 있는 사람들(2023.11, 서울 명동거리)

뒷모습은 나의 내면의 세계에서 나와 타인에 대한 생각, 삶의 의미와 살아길 길을 더듬어 가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나는 내 뒷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고 남의 뒷모습을 통해 나의 뒷모습을 유추하고 성찰하고 상상할 수 있음에 놀란다. 나는 이것을 전지전능한 신의 시선에 우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고자 하는 인간주체의 환상곡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제주도 삼양(육명심, 1994)

앞모습이 그의 진술과 그의 주장이라면 뒷모습은 나의 진술과 나의 주장이다. 그의 뒷모습은 보는 내가 주체이고, 나의 뒷모습은 보는 그가 주체이다. 신에게 시선을 맡기지 않는 이상 인간 서로서로가 서로의 주체이자 객체가 된다. 이제도 앞에도 서로의 상상이 되고 서로 대신 써주는 환상의 서사가 된다. 뒷모습은 시선을 넘어, 상상과 예술, 철학의 세상을 엿보는 작은 문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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