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 전 3월 어느 날, 목이 따갑게 느껴지면서 침을 삼킬 때마다 아프기 시작했다. 입을 벌려 거울을 보니 편도선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전에도 편도선이 부어 아플 때가 종종 있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예전에도 편도선이 아프면 열이 나게 되고 머리도 아파지므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보이면 항생제를 처방해 주어 며칠 먹으면 나은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도 시내 이비인후과에 가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1주분 약을 처방해 주었는데 낫지 않아 1주 후에 다시 갔더니 주사와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계속 아파왔고 병원에 다시 갔더니 의사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1주 단위로 약을 바꿔주었고 그렇게 석 달이 지나갔다. 거울을 통해 본 편도선의 중간 부분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살이 빠져 헤어져 있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물을 마실 때에도 따가워 마시기 어려웠다. 3개월 동안 몸무게는 5kg이 빠졌고, 의사에게 고통을 얘기했다. 의사는 자기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며 대학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해보라며 편지를 써 주었다.
다음날 나는 집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 특진을 신청했다. 담당의사는 개인병원에서 써준 편지를 읽고 조직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며칠 후, 집사람이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당장 입원해야 한다며 사무실에 있는 나를 찾았다. 조직검사 결과 암으로 판정되었고, 그날 오후 나는 사무실을 나와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나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이틀 동안 다른 부위에 암이 전이되었는지를 검사하기 위해 피검사, 엑스레이 등을 찍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껍고 답답해 왔다. 나는 내 상태가 심각한 상황임을 느끼게 되었지만 죽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내가 대학병원의 간호사였음으로 그녀의 걱정은 매우 컸다. 아내는 눈물을 감추며 내게 의사가 진단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냉정하게 대처하자고 했다. 어머니나 주위 분들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직장에도 알리지 않았다.
이틀 후 피검사, 엑스레이 결과 다른 부위로 전이가 되지 않았다는 검사결과와 함께 방사선치료를 하자고 했다. 방사선 치료기가 대학병원에 없으니 다른 병원에 가야 한다며 편지를 써 주었다. 나는 그날 퇴원했고 직장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나는 대학병원 의사가 써준 편지와 그동안 치료받은 자료를 들고 다른 병원으로 갔다.
치료방사선과 의사는 기록을 검토한 후, 일주일에 두 번 모두 25회의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의 방사선 치료를 위해 시뮬레이션을 했다. 상처 부위에 방사선을 투과하기 위해 얼굴에 검은색으로 십자가 표시를 하는 일이었다. 얼굴에 그려놓은 검은 십자가 표시를 지우면 안 된다고 했다. 세수하기가 어려웠다. 6월의 뜨거운 날씨에 땀을 흘려도 물수건으로 검은 선을 피해 닦아야 했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출근하나 걱정이 되었다. 1회용 반창고를 사서 붙이고 출근을 했다. 사무실을 혼자 쓰고 있었으므로 되도록 사람들을 피했다.
방사선치료는 실로 힘든 과정이었다. 치료실 문 앞에는 죽어가는 암환자들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고, 후유증으로 머리가 빠진 모습을 보며 나는 언제 머리가 빠질 것 인가를 기다리게 되었다.
방사선 치료 기사는 환자를 짐짝 다루듯 했다. 치료를 위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방사선 기계에서 치료받는 그 몇 분의 시간이 하루가 되는 느낌이었다. 주님의 기도가 입에서 저절로 나오고 빨리 이 고통의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10회의 방사선 치료 후 어느 날, 편도선 세포가 죽어 목이 아프지 않게 되었고, 이와 함께 물을 포함해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혀의 세포는 다시 돌아올 것인가? 의사에게 왜 이런 얘기를 내게 하지 않았는가?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스트레스와 회복에 대한 두려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누르게 되었다.
방사선 치료 중인 그 해 가을, 나는 몇 년 전부터 교리공부 출석 미달로 받지 못했던 영세를 받게 되었다. 4개월 간 25회의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나니 몸무게 55kg, 혀의 세포는 죽었고, 잇몸에서는 피가 나오고, 체력은 거의 바닥이었다. 이런 와중에 직장을 다니면서 정신력으로 버티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했다. 미사 때 주님의 기도를 노래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다행히도 몇 개월 후 혀의 세포는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인해 열과 함께 구강내염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럴 때면 재발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에 떨게 되었다.
이듬해 봄, 미국 보스턴 근교의 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치료받은 기록들을 들고 미국에 가서 의료보험 가입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서 다시 한번 좌절을 느끼기도 했다. 초청해 주신 어빈 교수님을 통해 대학 내 의료센터에 어렵게 가입하게 되었고, 닥터 버만이란 분에게 나의 병력을 얘기하고 진료를 받게 되었다. 닥터 버만은 나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고 한국에서의 진료 기록은 믿을 수 없다며 피검사, 엑스레이 등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귀찮은 존재로 싫어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 해 여름, 내가 살고 있던 곳으로부터 한 시간 떨어진 스프링필드에 공소가 있고, 보스턴 한인천주교회 신부님이 격주 토요일에 미사를 드리러 온다는 얘기를 듣고 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후 공소 회장님 댁에 초대받아 갔는데, 신부님을 모시고 온 김○○ 사이먼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보스턴에서 유명한 종합병원의 종양학 의사 선생님이셨다. 영세명이 나와 같은 사이먼 님께 염치 불구하고 나의 그동안 병력에 대해 말씀드렸더니, 잘 모르겠다며 관련 논문을 찾아보고 공부를 한 후 연락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만간 보스턴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한 달 후 주일 어느 날, 나는 두 시간 거리인 보스턴으로 사이먼 박사님을 만나러 갔다. 차를 운전하면서 내 마음은 너무 착잡했다. 불안함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외로운 심정이었다. 보스턴 한인천주교회에서 그분을 만나 미사 후 방사선 치료받은 상처 부위를 보여드리고 기록을 전해 드렸다. 그분은 60여 쪽에 이르는 논문과 복사 기록을 내게 주었다. 주로 미얀마, 방글라데시와 같은 아시아 빈민들에게 나타나는 희귀 암으로 증상과 함께 방사선과 항암제로 치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내게 닥터 버만과 소통하며 진료를 받으라고 했고, 문제가 있으면 언제라도 서로 연락하기로 했다. 보스턴 한인성당의 사목위원이시고 존경받는 의사 선생님께 내 기록을 보여드리고, 그분이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라는 생각에 돌아오는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다.
닥터 버만과의 만남은 주기적으로 피검사와 엑스레이를 찍고 이상이 있는지 추적하는 일이었다. 닥터 버만은 내게 검사결과를 얘기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의사에 대한 환자의 고소 사건이 많아 환자에게 섣불리 결과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서운했다. 하지만 내게 문제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스스로 위안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나는 닥터 버만에게 다음 달 한국에 돌아간다고 얘기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Congratulations, Mr. Yim, No evidence for cancer!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닥터 버만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보스턴에 있는 사이먼 박사님에게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는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며 내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나는 젊은 시절 암의 고통과 치료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다행히도 방사선만으로 치료된 경우지만, 항암제를 투여받는 환자의 경우는 더 어려운 투병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안다. 병원 예약 시간을 기다리고, 증상이 언제 나타나는지 기다리게 되고, 암의 크기, 전이 등 머릿속에는 암으로 인한 생각으로 짓눌리고, 일상생활이 어렵게 된다.
투병도 일상의 생활로 받아들이고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치료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날 어려웠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말없이 지켜보고 격려해 준 가족들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