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자가 너무 궁금했다.
아빠는 그냥 아빠였고 아홉 살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오빠는 내게는 항상 어른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산을 비스듬히 깎아서 계단식으로 단층 건물을 지었고 4학년 때부터 남녀 분반을 해서 남자애들은 저 위에 여자애들은 저 아래 건물에 배치했다. 무슨 남녀유별이 학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랬다.
이후 여중 여고를 거쳐 여대를 다녔다. 고등학교 다닐 때 잠깐 교회에서 학생부 활동을 하면서 남자 동기와 선후배가 생기긴 했지만, 남자가 희귀했던 공백이 너무 길었던 탓이었는지 난 그들과 스스럼없는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대학 입학 후 미팅 건수가 생길 때마다 한 번도 사양 않고 출석 도장을 열심히 찍었다.
늦은 감이 있긴 했지만, 이제라도 남자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했으니까.
단체미팅은 설렘도 긴장도 옆 사람의 말과 산만한 분위기에 적당히 감출 수 있어서 좋았다.
나름의 탐색전과 눈치작전이 끝나면 파트너를 정하는 피날레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학생들이 한 개의 모자 속에 각자의 소품을 몰래 넣고 여학생들이 그중에 하나를 고르면 파트너가 되는 거였다. 내가 고른 장갑 한쪽을 올려 보이니 테이블 끝에 앉은 덩치가 반달곰 같고 주근깨 투성이인 남학생이 얼굴 빨개져서 손을 들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장갑을 만지작거리며 장갑이 크고 늘어져서 누가 봐도 한 덩치 하는 그가 장갑 주인인데 왜 난 몰랐을까 좌절했다. 술수에 능하지 못한 내 순진함을 원망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거였다.
어느 날은 종이에 로미오와 줄리엣, 이몽룡과 성춘향, 영희와 철수 등등 세기의 커플들 이름들을 따로 써서 하나씩 골라 파트너를 정하기도 했다.
무슨 운명의 열쇠로 비밀의 문을 여는 것처럼 그때의 긴장감을 떠올리면 죽어 없어진 연애 세포가 통통 살아서 튀어 오르는 느낌이다.
당시 커피숍은 테이블에 설탕과 프림을 담은 단지가 상시 놓여 있었다.
농담도 잘하고 목소리도 씩씩한 맞은편 남학생이 정작 자신의 커피잔에 설탕을 옮기면서 손을 덜덜 떠느라 설탕이 커피에 닿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눈 오듯 떨어지는 장면도 보았다. 그때는 허세도 순수였다.
그 자리에서 파트너를 정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가서 맘에 두었던 상대에게 미팅 주선자를 통해 애프터 신청하는 방법도 있었다. 모두 사심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지만 분위기는 이미 보이지 않는 사랑의 짝대기들이 그어졌다가 지워졌다가를 반복하는 고도의 관찰력과 내숭, 포장과 포기, 그리고 체념이 난무하는 시간이었다.
유아교육 전공이라 하면 무슨 현모양처를 길러내는 곳으로 생각하는 남학생들이 많았고 그래서 인기 많았던 우리 과는 남학생들만 있는 공대에서 미팅이나 동반 엠티 요청이 많이 들어왔었다.
그런 자리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쪽 여학생들은 참 순수해요’였다.
거의 같은 스무몇 살 언저리에 있던 남자와 여자들이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순수’를 말하는 게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순수’라는 말에 부합하게 한없이 해맑고 귀엽고 상큼했다.
무용실, 미술실, 음악실을 오가며 거의 반 종합예술인이 되어있었고 때마다 ‘딸들아 일어나라’를 부르며 커다란 방패를 들고 철벽 방어하는 전경들을 향해 돌진하기도 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쟁하다가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지나가는 아이만 보면 함박웃음을 짓고 눈을 빛내며 예비 유아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런 ‘순수’였던 우리가 이제 ‘술수’라는 연장 정도는 기본으로 상시 갖춰야 살아갈 수 있는 현장에서 닳고 닳은 어른이 됐다. 교육에만 충실하면 다 잘 될 거라는 생각은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여지없이 무너지고 각박한 유치원 현장에서 박봉에 허덕이고 아이들보다 더 손이 많이 가는 까칠한 학부모들의 등쌀 그리고 당연시되는 초과 근무로 몸도 마음도 점점 말라갔다.
세월은 흐르고 몇몇 친구들은 우리가 그렇게 욕했던 원장이 되어 이제 교사들 뒷담하는 위치가 됐다. 그 친구들을 통해 유아교육 현장의 생생한 얘기를 들으며 그놈의 ‘라떼는’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웃다가 한숨도 쉰다.
내가 생각하는 순수란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는 것.
그래서 순수는 한편 사납기도 하다.
앞뒤 안 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발 두 발 앞으로 걸어가는 것.
그래서 순수는 무모하기도 하다.
세상이 손가락질해도 내 손으로 나를 쓰다듬는 것.
그래서 순수는 고독하고 바보스럽다.
사랑에도 술수가 모자라 늘 실수였고 손해를 봤다.
그래서 내 청춘이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막을 내린 거라고 원망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 다시 용감하게 ‘순수’해지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