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는 매 화마다 추앙하며 OTT로 다시 돌려보는 드라마이다.
잘생긴 알코올 중독자 구 씨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멀어지고 밭일 나갈 때 걸치는 몸뻬마저 예뻐 보이는 무표정한 미정을 볼 때는 저 신비한 매력은 어디서 뿜어져 나오나, 생각한다.
헬륨이 다 빠져 바닥에 가라앉는 풍선처럼 꿈이나 열정 같은, 뭔가 뜨거운 것을 다 비워낸 캐릭터설정 덕분이다. 사실 뭔가가 훅훅 빠져나간 걸로 치자면 나도 만만치 않은데……, 왜 다르지? 이렇게 뻔한 정답을 가진 질문도 가끔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런 미정이 더 그럴싸해 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계란 프라이로 치자면 흰자인 경기도에서 지하철을 타고 계란 노른자인 서울에 있는 회사로 출근하는 장면이다. 자세히 말하면 빌딩의 회전문으로 들어온 수많은 직원이 목에 건 사원증을 출입 게이트에 대고 지하철 개찰구 같은 곳을 통과하는 장면이다. 사원증을 인식기에 댈 때마다 삐, 삐, 소리가 연신 울려댄다. 개중에는 사원증을 목에 걸 여유조차 없다는 듯 긴 끈을 늘어 뜨리 채 손에 쥐고 그 ‘삐’와 동시에 전력질주해서 뛰어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내 눈에는 그것도 멋지다.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으로 말이다.
‘이건 이제 내 일상이야, 사건도 아니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미정은 그 ‘삐’를 들을 때마다 어떤 기분일까?
첫 출근했을 때 들었던 그 ‘삐’는 단지 그냥 ‘삐’이기만 했을까? 그때의 ‘삐’는 지금의‘삐’와 어떻게 다를까?
높은 취업률을 뚫고 서울에 있는 회사에 입사한 첫 설렘은 아마도 그 ‘삐’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벅차고 우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담기에는 이 사소한 ‘삐’는 너무 하찮아서 스멀스멀 삐져나오는 웃음을 이로 깨물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모두 출입 게이트를 통과할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된 내 사회생활도 어린이집 출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나는 입사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뚫지도 않았고 또 이곳은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이니 지하철을 탈 필요도 없고 뱅뱅 도는 회전문도 없다.
어린이집 출입문은 항상 잠겨있다.
유리문 옆에 조그만 지문 센서기가 있고 그 위에 보안업체에 등록된 내 엄지손가락을 얹는다.
난 가끔 이 지문 센서기가 생물처럼 살아있다고 느낀다.
손가락을 대고 문이 열리기까지 약 2초 동안 나와 문 사이에 멋쩍은 정적이 흐른다. 손끝에서 끝나는 핏줄이 다시 길어져 세상 밖의 보이지 않는 핏줄과 연결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매번 근거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실제로 에러가 나서 문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는데 설마, 하며 손가락을 다시 대면 역시나 문은 열린다. 그때 소리는‘삐’가 아닌 ‘딸깍’이다. 그리고 그 ‘딸깍’과 동시에 새로 연결된 핏줄로 피가 돌아 바깥세상에서 내 첫 맥박이 뛰는 것처럼 나도 같이 쿨렁, 하고 몸까지 흔들린다.
어린이집은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작고 정다운 정원이 있고 나무로 만든 얕은 담 사이에 일곱 난쟁이가 사는 집 문처럼 키 작은 여닫이문이 있다. 그 문은 밀 때마다 삐거덕, 소리가 나고 그 소리는 바람이나 참새, 담장의 개나리와도 잘 어울린다. 솔방울, 나뭇잎, 나뭇가지들을 매단 아이들이 만든 모빌과도 조화를 이룬다.
또 이곳은 시립 도서관 바로 옆에 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이사 와서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큰 공을 세운 이 소박한 도서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최애 장소이기도 하다. 이런 조합은 대도시에 있는 어떤 회사와도 비교가 안된다.
지하 자료실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계단을 내려가는 내게 하늘 선생님이 말한다.
"연장 선생님! 혹시 자료실에 있는 문에서 모르는 사람이 불쑥 나와도 놀라지 마세요.
가끔씩 도서관 직원이 시설 점검하러 왔다갔다 하거든요"
그 말은 도서관과 어린이집이 땅 위에서는 두 건물이지만 땅속으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동화 형식으로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이다.
땅속에 사는 눈 어두운 두더지가 다람쥐를 초대해서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구경을 시켜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쪽은 내가 신나게 일하는 어린이집이고 저쪽은 최고의 휴식처인 도서관이야. 밖에서 보면 전혀 티가 안 나지만 사실 이렇게 하나로 연결돼 있어. 정말 근사하지?”
순간 내 마음속에서 수많은 ‘딸깍’들이 연달아 딸깍, 딸깍 울리기 시작했다.
이 뜨거운 ‘딸깍감정’이 식지 않기를, 언젠가 식더라도 그 순간이 아주 느리게 찾아오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