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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나무 May 29. 2024

5. 늑대야, 노올자!

Essay

어린이집 출근이 확정되고 나서 많은 것들이 걱정됐다. 그중에서도 내가 익히 알던 이야기들이 너무 오래 묵은 죄로 땅속 깊이 묻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눈부신 현대 문명에 어울리는 내가 모르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거라는 걱정이 가장 컸다. 혹시 그림책 주인공이 ‘AI’인 그런 그림책을 보아도 놀라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한물간 나 같은 교사는 이런 상상도 해본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기심으로 입을 동그랗게 모은 아이들이 내 앞에 둘러앉아 있다. 한물간 걸 들키고 싶지 않은 나는 눈치를 보다가 “옛날옛날, 아주 오랜 옛날, 깊은 산골에 떡장수 엄마와 착한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구연동화를 시작하자마자 엄지손가락을 습관적으로 입에 넣는 다솜이가 갑자기 빨고 있던 손가락을 급히 빼더니 말한다.

 “떤땡님! 대체 그게 언제 적 얘긴 인데……, 해님 달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떤땡님이 아직도 있다니,

  대체 우리를 뭘로 보고……”

이어서 낮잠 시간에 이불에 오줌을 눈 서진이가 동지라도 만난 듯이

“그냥 들어주자, 떤땡님이 민망해하잖아” 하며 어서 계속하라고 한물 넘어 두물 가고 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보고 듣고 물고 뜯어도 결코 물리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인기 있는 동화는 여전히 서양판 고전 ‘아기돼지 삼 형제’와 한국판 고전 ‘해님과 달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가끔 연식은 좀 딸리지만 중간 고전 반열에 오른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나 ‘강아지 똥’처럼 그놈의 ‘똥’ 때문에 아이들의 관심이 한 번씩 훅, 밀려가기도 하지만 결국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향수병에 걸린 하이디가 알프스로 다시 돌아와 할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목동 피터와 풀밭 위에서 뛰어놀며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것처럼 아이들은 한 권에 몇 만 원 하는 입체 그림책이나 코가 오똑한 찰리나 노란 곱슬머리 올리비아가 주인공인 뭔가 개운한 맛이 덜한 그림책들 속에서 놀다가도 결국은 아기돼지 형제들, 그리고 해님이 달님이에게 달려오는 것이다.     


해님과 달님은 교실에 있는 역할놀이영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 영역 근처에만 가면 나는 한순간에 호랑이가 돼야 한다. 가끔은 나도 악역이 아닌 착한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그럴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모형 집에 있는 창 안으로 손을 푹 집어 놓고 그 손을 만지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해님들과 달님들에게 ‘엄마가 떡 파느라 고생을 너무 해서 손이 거칠어지고 피부가 털처럼 일어났다’고 말하는 이 장면은 수십 번을 반복해도 그 긴장감 때문에 나도 아이들도 다 같이 심장이 쫄깃쫄깃해진다.

그 와중에 나는 이 오누이 엄마의 녹록지 않았던  삶을 알아주는건 호랑이밖에 없구나,라고 맥락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도 한다.     


또한 ‘아기돼지 삼 형제’만큼 현명한 부모 역할, 협동, 형제애, 건축, 위기 대처능력 등등을 아우르는 그림책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이제 너희들도 웬만큼 컸으니 집을 떠나 각자 너희만의 집을 짓고 살거라”      

앞치마를 입고 있는 엄마 돼지의 이 눈물겨운 선포는 또 어떠한가! 이런 매력 있는 서두를 가진 동화가 또 얼마나 있을까! 나는 아기돼지 삼 형제 그림책의 여러 버전을 보면서 항상 이 장면에서 엄마 돼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한다. 어떤 책은 금방 눈물을 쏟을 것처럼 호소하는 표정이고 또 다른 책은 자식들 뒷바라지는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듯 사납게 눈을 치켜뜬 엄마 돼지도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버전은 엄마돼지가 담담한 얼굴로 한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집 밖을 가리키는 그림이다. 무엇이 자식을 위한 최선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 소란스럽지 않게, 하지만 대범하게 실천하는 엄마의 그 모습이 좋다.      


분장을 한 것도 니고 약간의 목소리 변조만 할 뿐인데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벽돌 블록으로 쌓은 집을  못된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주 진지하게 방어를 한다. 너무 몰입하는 아이들이 걱정되어서 알고 보니 늑대는 친구가 필요한 거였고 그걸 잘 표현 못해서 돼지들이 오해한 거라며 즉석으로 이야기를 각색한다. 그러면 집 안에 있던 해님이 와 달님이, 아니 아니 아기돼지들은 이건 뭐지?라는 표정으로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늑대와 악수하고 포옹하며 역할놀이를 진정한 해피앤딩으로 마친다.      


‘미안해’ 하면 ‘괜찮아’ 하는 아이들

‘사랑해’ 하면 ‘같이 노올자’ 하고 담을 허무는 아이들     


그래, 너희는 항상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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