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스포 주의)
* 영화 「디어 스트레인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재 국내 개봉 예정 없습니다. 만약 수입이 된다면 글 내립니다!
우선 켄지가 연구하는 '폐허'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한다. 켄지는 '폐허'를 두고 신을 운운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그저 더럽고, 헐은 기분 나쁜 형체일 뿐이니까. 켄지와 제인, 카이 가족이 그렇다. 이들은 이미 부서진 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겐 더 나아갈 길이 없다는 걸 진작 알았어야 했다.
켄지는 제인의 남편이지만 제인의 아들인 카이의 친부親父가 아니다. 그러니 켄지는 이들 모자에겐 언제나 낯선 타인, 즉, 이방인(stranger)이다. 그러나 제인도 마찬가지. 자신의 일을 이해해 주지 않는 남편과 부모님.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제인 또한 이방인이 된다.
작품 자체에서의 구별은 없지만 나는 이 영화가 크게 1부와 1.5부, 2부로 나뉘어진다고 생각했다.
1부는 아이와 일, 내조와 일, 엄마로서, 아내로서 해내야만 한다고 세간에서 강요하는 편견을 못 견뎌 하는 제인의 이야기가 주제다.
남편 켄지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씻기는 일을 할 때 '나 참 좋은 남편이야' 따위의 뉘앙스를 풍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진 카이가 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지기로 결정했다면 생색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제인은 혼란스러워 한다. 그의 공허한 눈은 마치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은듯한 느낌이다.
여담이지만 집에 있을 때와 다르게 일을 할 때는 눈이 빛나던 것이 인상 깊었다.
1.5부는 아들 카이의 납치 사건이다.
왜 하필 1.5냐 ···. 아들의 납치사건이 제인의 공허함과도 켄지의 분노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부에게 있어 아들의 존재는 소중하고, 지키고 싶은 존재지만 동시에 어딜 가나 신경 써야 하는 조금은 성가신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불행해질뿐. 아들을 잘 챙기지 않고 한눈을 팔았던 켄지는 그 나름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제인은 켄지에 대한 믿음을 더더욱 상실하게 된다.
심지어 아들을 납치한 사람이 제인의 전 남자친구이자 카이의 친부인 '도니'라면. 대강 이 부분부터 제인보다 켄지가 급격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내재되어 있던 두려움과 본격적으로 마주한 인간은 그 누구보다 무너지기 쉬운 상태다.
그가 정확히 범인이란 걸 알기 전, 켄지는 도니를 찾아가 격한 몸싸움을 벌인다. 이미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간 것이다. 원래 켄지는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든 겉으로는 차분함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사회성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하지만 아들의 납치 이후부터는 전혀 참지 않게 되었다. 서서히 차오르던 것이 끝내 북받치게 됐다.
그리고 이때 2부가 시작된다. 2부는 켄지의 이야기로, 더는 거리낄 것이 없는 망가진 부성父性을 말한다.
켄지는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피로 이어진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 내에서도 끝까지 이방인으로 남는다. 영화를 보며 감독이 어떻게든 켄지를 배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그가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카이가 부부의 품으로 돌아온 후, 도니가 죽은 채 발견된다. 경찰은 이것을 카이가 총을 잘못 만져 실수로 도니를 쏜 것으로 보고 조사에 착수한다. 이 일로 가족이 또 한 번 부서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헤매는 제인과 그 많은 걸 다 알기엔 너무나 어린 카이, 모든 걸 짊어질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아는 켄지.
켄지는 끊임없이 "카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를 외친다. 사실 카이에게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켄지 본인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냥 소중한 '나의' 아이가 실수로라도 사람을 죽였을 리 없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어지는 불행을 견디지 못한 켄지는 제인과의 이별을 선언하고 집을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 끝도 없는 분노를 목격하고서야 이대로면 아무것도 해결되는 게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그는 뒤를 쫓아다니던 경찰에게 거짓 자수를 한다. 자신이 도니를 죽였다고. 이미 그의 가족을 의심하고 있던 경찰은 당연하단 듯 켄지를 체포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솔직히 매우 중구난방에 정신 사나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전하고 싶은 알맹이는 분명 존재한다.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동양인 부부. 이 부부는 모국어로 대화조차 하지 못한다. 서로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이것이 부부의 정체성 같았다. 자신의 말을 하면, 즉,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상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그만하라는 말을 영어로 내뱉게 된다. 이들은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이방인인 채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다. 왜 굳이 배우들에게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게 하였는지 불만을 제기하는 글들을 꽤 봤는데 난 이것이 켄지와 제인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느꼈다.
그들이 타고 다니는 차도 마찬가지다. 하도 낡아 트렁크도 제대로 닫히지 않을 뿐더러 이동할 때면 기괴한 소리까지 난다. 거기다 빨간색으로 크게 새겨진 'BLANK'. 하지만 결코 차를 바꿀 순 없다. 제인의 아버지가 아끼시는 물건이니까.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켄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켄지를 다 부서져 가는 더러운 건물을 보듯 혐오한다. (재밌는 점은 함께 폐허를 연구하는 교수들과 이미 가족에게 평생을 바쳐 바스라진 제인의 어머니는 켄지에게 호의적이다.) 앞서 말했듯 켄지는 폐허를 연구한다. 지진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은 이후부터 폐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물. 따라서 켄지는 이미 망가진 것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다.
진작에 파괴된 것을 지키고자 한다면 당연히 자기 자신도 부서져야 한다.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비로소 공감대가 형성되고, 눈앞에 존재하는 혐오가 아름답게 보일 테니까. 절대 고쳐 쓰자는 게 아니다. 켄지는 폐허 그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어쩌면 그는 가족을 잃은 후부터 완전한 것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죽은 채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제인을 처음 만났을 때, 제인은 카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켄지가 제인을 사랑하게 된 건 어쩌면 그가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남자친구가 도망쳐 버린 여자를, 친부가 달아나 버린 아이를, 이미 산산조각난 이 두 사람을, 켄지는 아름답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
켄지는 세상의 일반적인 무결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가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전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왜냐하면 켄지의 사랑은 그런 모양이니까.
제인은 인형을 조종한다. 자신이 인형이고, 인형이 자신인 것처럼. 특이한 건, 제인과 인형 단 둘 뿐일 때는 인형이 자신을 공격하거나 누군가 자신의 인형을 상처 입히는 연기를 펼치는데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모두가 자신과 인형에게 호의적인 연기를 한다. 이건 아마 제인의 결핍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인정해 주지 않는 가족과 일을 넘어 자신을 인정해 주는 동료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크니까. 그럼 왜 하필 인형극이어야만 했을까. 흔히 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을 인형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점을 역이용한 것이 아닐까? 제인에게 인형은 자신을 꾸미는 용도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탈출구다. 그에게도 분명 켄지 못지않은 자기 파괴적인 부분이 있다. 다만, 제인은 그것을 일정하게 조절할 줄 안다.
말이 나왔으니. 작품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건 폐허, 차 뿐만이 아니다. 제인의 인형. 특히 무대 위에서 제인이 연기한 커다란 인형이다. 이 인형은 켄지의 무의식 속에도 몇 번이나 등장한다. 즉, 제인에게만 적용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 생각에 그 인형은 제인의 욕구이자 켄지가 두려워하는 무언가의 실체화다. 원래는 제인의 안식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정황상 '안식처'라는 표현보다는 '욕구'가 맞을 것 같다. 제인은 그 인형을 매우 애지중지 다룬다. 포인트는 인형이 '망가지면' '고쳐 준다' 는 것이다. 부서진 걸 부서진 채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켄지와는 다르다. 뭐랄까, 제인은 대체로 켄지보단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켄지는 조교수인 반면 제인은 단장이다. 남에게 잘 보여 점수를 따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고용 불안정의 압박감에 시달리는 켄지에 비하면 제인은 가족의 반대를 떨쳐내기만 한다면 직장으로 돌아가 자신의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돌아올 곳, 내가 존재해야 할 곳, 내가 나로서, 내가 제인으로서 살 수 있는 곳. 망가지면 어떻게든 고쳐서 다시 쓸 수 있게 만들어야만 하는 공간. 인형극은 팔의 높낮이가 조금이라도 달라져도 연습 때와 느낌이 바뀌는 매우 가변적인 예술이지만 어쨌든 제인은 그곳에서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예상과 살짝 달라져도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켄지에겐 어떨까. 그는 인형에게 아주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총으로 위협하거나 달려가 그를 붙잡으려고 한다. 만약 제인이 완전하고, 평온하기만 한 삶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버려지는 건 누구일까. 당연히 켄지다. 켄지가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모르겠다. 가족과 헤어지는 것? 이건 오히려 추상적이다. 많은 선택지 중 내가 가장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폐허는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듯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고, 세상에 불완전한 것이 사라지면 켄지는 설 곳이 없다. 후반부에 켄지가 그 인형을 따라가 붙잡으려 했을 때, 인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다. 결국 켄지는 그마저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아마 그건 켄지가 마음을 먹는 과정을 연출한 게 아닐까.
결말을 보면 켄지는 뭔가 결심한듯 제인에게 전화를 걸어 '재결합'을 원한다. 여기까지는 켄지가 도로 폐허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켄지가 거짓 자백을 하게 되며 제인은 카이와 단 둘이 남게 된다. 심지어 도니의 무덤 앞에서. 비로소 진짜 가족이 만난 것이다. 제인과 도니, 그리고 카이. 가짜인 켄지는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로소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둔 것이다. 다 스러져 가는 걸 '무'로 돌아가게 만드는 방법은 아예 파괴하는 것뿐이다. 그럼 그 빈 공간에는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는 강인함과 희망이 피어오른다. 마치 결연한 제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망가진 건 그 자체로 이미 수명을 다했다. 그것을 고쳐서 쓸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영화가 주는 강렬한 한마디는 이것이었다. 또 하나가 더 있다면, 계속해서 켄지의 가족을 의심하고, 결국엔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는 경찰을 보면 이방인을 받아 줄 낙원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줌과 동시에 절망적이기도 했던 작품이다. 화면 가득히 들어찬 분노가 난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