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말로 받고 되로 주는 사람들이 있다. 각자의 사정이 바쁘든, 할 일이 많든. 관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더 받고 덜 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모두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되를 받고 말로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을 받고 되로 돌려주는 사람이 있다. 되로 돌려줄 수 밖에 없는 나의 형편을 이해하고 곁에 있어주는 것이 참으로 다행인 사람들이다. 한편으론, 되를 받고 말로 주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원망감도 있다. 뭐 의미가 있겠는가. 태초에 그런 관계였거늘.
세상엔 되로 주고 되로 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저 그정도를 주고 받는 사이. 지인이라고 표현하지만 지인보단 가깝고 친구보단 먼 사이. 되로 주지도 못하고 되로 받지도 못하는 사이도 있다. 하지만 사이는 사이다. 관계는 관계다. 너른 세상 속 마주치며 관계를 맺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관계 맺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요즘이다.
되도 못 주고 되도 못 받는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주제다. 친구의 층위에 대해 고민해본 대학생이 있을까. 있다면 나와주길 바란다. 그와 나는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으므로. 친구의 층위는 생각보다 깊고 넓고 다양하다.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없는지부터 어떤 약속을 어떻게 잡고 만날지에 따라 친구의 층위는 갈린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친구가 되는 단계의 층위가 맞겠다.
친구의 정의나 개념 따위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이야길 나누고 말을 섞으면 모두 친구가 되는 줄 알았으므로. 구태여 친구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우린 친구였기 때문에.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진정한 어른이 되고 나서. 친구란 호칭은 과분해졌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린 지인은 맞아도, 친구는 아니었다. 친구는 더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더 무언가 함께 할 수 있고, 그래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들며 모든 것이 연속적으로 바뀌었다. 그 전까진 불연속적으로, 하나의 관계에서 다른 이름의 관계로 넘어가는 게 순탄했다면 이제는 달라졌다. 더 많은 단계를 밟아야 했고, 더 많은 연속성을 증명해내야만 했다. 지인에서 친구로 넘어가는 과정은 더 연속적이어야 했다. 불연속성이란 관계에 허락되지 않았다.
만나기 전, 그간 각자의 경험들이 누적돼 너와 난 연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특정하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저 너와 나의 이야기다. 우리들은 여러 층위를 거쳐야 지인이 될 수 있었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되나 말을 주든, 되나 말을 받든 그는 연속적 한 단계의 일부분일 뿐. 어른이 되면 각자의 경험들로, 각자가 되를 주든 말을 주든 되를 받든 말을 받든, 우린 연속적인 한 관계일 뿐이다. 하나의 단계일 뿐, 우리를 이름 지어줄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그렇게 스쳐 지나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