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사건, 하나의 운명
순간, "카톡" 하는 알람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민준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어 화면을 확인했다. 할머니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민준아, 이번 아가씨는 할머니가 다녔던 에꼴 드 파리에서 공부한 수재란다. 할머니가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이니, 이번엔 꼭 만나봐야 한다."
민준은 메시지를 읽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있는 이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결국 짧게 답장을 보냈다.
"네, 그렇게 할게요. 할머니."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현수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이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자, 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민준은 머뭇거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할머니 문자예요. 또 결혼 얘기를 하시네요. 이번에도 소개팅 자리를 주선하셨대요. 얼른 만나보라고 하십니다."
현수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 씨, 이렇게 불러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요. 결혼 상대는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만나야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누군가를 만나려 하면 오히려 더 힘들어질 수도 있잖아요."
민준은 그 말에 동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운명의 상대는 언젠가는 만나겠죠."
현수는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민준 씨는 어떤 사람이 이상형이에요?"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어머니처럼 강인하면서도 약간 카리스마 있는 여자가 좋습니다. 저를 리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겠죠. 저는 공부만 열심히 했지, 인생 공부는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제 결혼 상대는 자존감이 높고, 자신만의 신념과 프라이드를 지닌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현수는 순간 누군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 이름은 수현이었다.
비행기가 유럽을 향해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르기 전, 기내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여행을 앞둔 승객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가 묻어났고, 민준도 조용히 창가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내 기내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는 첫눈에 봐도 거칠고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그의 몸은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였지만, 표정만큼은 날이 서 있었다. 얼굴은 이미 술기운이 올랐는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짙은 주름이 파인 이마는 불만과 거만함으로 잔뜩 굳어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세련된 듯했지만 어딘가 흐트러져 있었고, 손목에 찬 시계는 가격을 자랑이라도 하듯 번쩍였지만, 정작 그의 태도에는 품격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서비스야? 내가 주문한 와인은 이게 아니라고!"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컸다.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사람처럼, 감정의 배출구를 찾지 못해 소리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살피는 눈길은 없었다. 마치 이곳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라도 되는 듯, 그는 주위 승객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을 휘두르며, 그는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쳤다. 쾅! 소리에 기내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승객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거리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왕’이라도 된 듯, 무례함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곤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 단어조차 그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의 어투와 몸짓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오만함과 타인을 깔보는 태도가 묻어났다.
주변의 승객들은 점점 더 불편해하며 자리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듯, 거칠게 손을 휘저으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의 목소리는 기내를 가득 채울 만큼 컸다. 주변 승객들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승무원들이 신속히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수현은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남자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다시 확인하고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남자는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확인할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이라고!"
그는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승객들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기내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수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고, 오히려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손님, 이곳은 많은 승객들이 함께 여행하는 공간입니다. 모든 승객의 안전과 편안함이 최우선이므로, 다른 분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동은 삼가 주셔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 있었다.
남자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에게 향하는 수많은 시선을 의식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억지를 부렸다.
"난 고객이야! 고객은 왕이라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수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걸음 다가갔다.
"손님, 저는 이 항공사의 승무원이며, 저의 임무는 모든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불편을 느끼신 부분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드리고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내 곳곳에서 작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승객들은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민준 역시 그녀의 대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강인하고 카리스마 있는 여성… 내가 찾던 이상형이 바로 여기 있었구나.’
비행기 안의 긴장감이 점차 가라앉았다.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고개를 떨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알겠소… 미안하오."
수현은 부드럽지만 확고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손님.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서며 다른 승객들의 안정을 살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민준과 마주쳤다. 민준은 그녀의 눈빛에서 강인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꼈다. 단순한 승무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고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비행기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수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하게 일을 이어갔다. 그러나 민준의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
학회 마지막 날, 민준은 동료들과 함께 파리의 유명한 재즈 클럽 ‘Le Caveau de la Huchette’로 향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돌길이 이어지는 거리는 노을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곳곳에 자리 잡은 카페와 레스토랑에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잔잔한 거리의 풍경 속에서 재즈 클럽으로 향하던 민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길 한복판에서 한 청년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그는 격앙된 얼굴로 주변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다들 멈춰! 가까이 오지 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다 죽여버릴 거야!"
그의 손에 쥐어진 칼날이 가로등 불빛에 번뜩였다.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몸을 피했다. 일부는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고, 일부는 허둥지둥 뒷걸음질 쳤다.
민준과 그의 동료들도 당황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군중 속에서 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비행기의 그 승무원이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청년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접근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너도 날 무시하려는 거냐?"
그의 눈에는 분분노와 함께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
"이 사회에서 난 이방인이야! 누구도 날 받아주지 않아! 다들 날 무시하고 배척한다고!"
수현은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여기 있어요. 저를 믿어주세요."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숨을 깊이 들이쉬고 저와 이야기해요. 당신이 왜 이렇게 힘든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느꼈는지 듣고 싶어요."
청년은 잠시 흔들리는 듯했지만, 이내 눈빛을 날카롭게 바꾸며 칼을 들어 올렸다.
"그래? 날 이해한다고? 그렇다면 네가 나와 함께 가야겠어.!"
그는 위협적으로 칼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사람들은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민준도 긴장한 채 숨을 삼켰다. 그러나 수현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당신이 겪어온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청년은 점점 더 흥분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난 아무도 믿지 않아!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그 순간, 수현은 빠르고 날렵한 동작으로 청년의 팔을 붙잡고 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악!"
청년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자, 수현은 단호하게 그의 손목을 꺾었다.
쨍그랑—
칼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탄성을 질렀다. 몇몇은 감탄한 듯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청년은 당황한 채 저항하려 했지만, 수현은 숙련된 동작으로 그를 제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수현은 차분하게 청년을 그들에게 넘겼다. 청년이 경찰에게 연행되기 직전, 수현은 마지막으로 그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경찰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며 청년을 데려갔다.
사태가 마무리된 후에도 민준은 여전히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