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의 사랑 ,민준
"현수야, 일어나 봐."
김 교수가 늦잠 자는 현수를 깨웠다.
"현수야, 어제 내가 갔을 때 해인이 어땠어? 괜찮았니?"
잠결에 해인이 이야기가 나오자 현수는 잠이 확 달아났다.
"해인이 어제 저랑 있을 때는 괜찮았어요. 왜요? 해인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지금 해인이 할머니한테 전화가 왔는데, 해인이가 엄마가 계신 프랑스에 간다는 쪽지만 놔두고 집을 나갔다고 하네. 해인이 할머니가 서울에서 전화를 계속했는데 전화는 안 받길래 급하게 아침 버스로 내려왔는데 편지만 있더래. 해인이 엄마가 계신 파리로 전화도 했는데 해인이 연락을 못 받았다 하시고. 큰일이다, 현수야! 해인이 만났을 때 해인이 몸은 어땠니?"
현수는 어제 해인이가 자신을 만나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를 차마 꺼낼 수는 없었다.
"교수님, 제가 어제 해인이를 만났을 때는 해인이가 몸이 피곤했던 것 같았어요. 그래서 포도당 수액에 수면 유도제 성분인 미다졸람(Midazolam) 앰플을 넣어서 잠을 자게 했어요."
"그래, 잘했다. 현수야, 그런데 그런 처방은 먼저 나에게 허락을 구하고 해야 하는 것 잊지 말아라."
"네, 교수님. 알겠습니다."
현수는 김 교수를 뒤로하고 해인의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해인은 현수와 그 일이 있은 뒤 죄책감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죄책감이라는 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었지만, 새벽바람을 맞으며 지리산에 올라오게 된 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인은 그 길로 '카리타스' 수녀원으로 향했다.
수녀원에서 입소 원서를 쓰고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인은 임신 사실을 알았다. '카리타스 수녀원'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한 사목 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회였다. 그곳에서는 미혼모를 돌보는 일도 같이 하고 있었다.
해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원장 수녀님은 지리산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만약 부모님께 연락하거나 할머니, 할아버지께 알리는 날에는 이곳을 나가겠다는 해인의 엄포 때문에 원장 수녀님은 해인을 미혼모 시설로 보냈다.
그곳에서 해인은 민준을 낳고 새로 들어온 미혼모들을 돌보는 생활을 하면서 대학 입학시험도 준비했다.
민준이가 하루하루 자라는 걸 보고 있으면 해인은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감사한 무게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날들이었다. 해인이가 자립하고 공부하는 동안 수녀회에서는 해인의 자립을 돕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해인은 학업이랑 양육을 병행할 수 있었다.
민준이는 자라면 자랄수록 아빠 현수의 모습이 보였다. 가늘고 긴 팔, 다리와 크고 동그란 눈매, 그리고 영민함까지 민준이는 현수였다.
민준이가 아빠 이야기를 꺼낸 건 어린이집에 다니고 나서부터였다.
"엄마. 지원이는 아빠랑 매일 축구공 차고 놀고, 영준이 아빠는 방귀를 엄청 크게 뀐대. 웃기지? 크크. 그리고 솔이 아빠는 매일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시고. 근데 엄마... 민준이는 왜 아빠가 없어?"
"민준아, 아빠 보고 싶어? 아빠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 민준이처럼 똑똑해서 의대생이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어. 지금은 아빠를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아빠가 민준이를 보러 올 거야. 서로가 그리워하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거든."
"엄마, 나는 어려서 아빠를 못 만난 거 해도 아빠는 민준이가 보고 싶지 않을까?"
해인은 차마 현수가 민준이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민준아! 아빠는 늘 민준이를 생각하고 있는데, 미국에 있기 때문에 민준이를 만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민준아, 민준이가 엄마보다도 훨씬 더 큰 어른이 되면 아빠를 만나러 갈 수 있어."
"응, 알았어. 엄마, 민준이는 아빠를 만나러 미국에 갈 거야."
"그러자 민준아. 아빠뿐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도 다 만나 뵙고 오자."
해인은 그 말이 마지막이 될지 몰랐다. 민준을 재워놓고 해인은 밤바람을 쐬고 싶어 공원으로 나섰다. 여름밤이라 많은 사람들이 러닝을 하고 걷기 운동도 하고 있었다. 귀여운 하얀색 몰티즈를 데리고 산책 나온 할머니, 공원 근처에 세워진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러 나온 학생들, 아빠랑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 해인의 눈에 들어왔다.
해인도 슬슬 속도를 높여 걷기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차 한 대가 전력 질주하며 공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비켜서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놀라운 속도로 차가 공원 곳곳을 지나가자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핏자국이 공원 안을 메우고 있었다. 해인은 그 차를 운전하는 20대 꽃다운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인의 몸이 차 위로 붕 뜨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저녁 9시 뉴스에는 서울 시내 공원에서 차를 몰아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고 숨지게 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