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다. 예전에는 겨울을 좋아했다. 볼이 얼얼하게 추운 날에도 옷을 여미지 않고 바람을 맞으면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너무 추웠기 때문에 좋아했다. 마음은 이미 그 바람보다 차가웠기 때문에 겨울바람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여름이 좋아졌다. 이제 마음이 예전만큼 춥지 않아서인지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걸으면 그 냉기에 뼈까지 얼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를 낳고는 더욱 찬바람이 무섭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나는 동면에 들어가는 개구리처럼 움직임이 거의 없다. 최소한만 움직이고 움츠리고 있다가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활동을 시작한다.
일 년 중 내가 가장 많이 움직이는 계절은 여름이다. 여름의 뜨거운 햇볕에 빨래를 말리고 싶어서 하루에 한두 번은 세탁기를 돌린다. 아침에 널어도 늦은 오후면 마르는 수건의 까실한 냄새가 좋다. 겨울과는 다르게 거실 통 창끝에 살짝 걸리는 햇볕을 보면서 마시는 차가운 커피도 좋다. 매미소리까지 들리면 정말 여름에 온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 든다. 여름에 젖어들다 어느새 여름에 취할 무렵 어느새 저녁이 서늘해지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여름과일 때문이다. 수입과일보다 우리나라의 과일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여름과일이 좋다. 요즘은 제철이 아니어도 과일을 사철 먹을 수 있지만 여름과일은 제철이 아니면 쉽지 않다. 아오리 사과나 캠벨포도, 자두나 복숭아는 여름에만 여름이어야 여름이기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나는 여름이면 집에 과일이 있어도 마트에 갈 때마다 더 사지 못해 아쉬워하면서 과일을 사서 집에 쟁여둔다. 그래도 나이가 있어서 예전만큼 많이 먹지는 못한다. 예전에는 앉은자리에서 포도 몇 송이는 혼자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세 식구가 한송이 소박하게 먹는다.
오늘도 동네 마트에 갔다가 참지 못하고 복숭아 한팩을 사 왔다. 집에는 이미 천도복숭아와 포도, 아오리 사과도 있었지만 복숭아가 빠진 냉장고는 뭔가 허전했다. 매번 내가 좋아하는 딱딱이 복숭아를 산 것이 미안해서 오늘은 아들이 좋아하는 말랑이 복숭아를 샀다. 점심을 먹고 야심차게 복숭아를 깎아서 자르다가 기겁했다. 분홍색 꿈틀거리는 벌레가 갑자기 밝아진 세상에 놀란 듯 고개를 치켜들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벌레를 , 그중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한 손에는 복숭아를 한 손에는 과도를 든 채 나는 멈춰버렸다. 등골이 서늘하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나와는 반대로 벌레는 더 힘차게 꿈틀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시에 바늘이 꽂히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나는 복숭아를 통째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뚜껑을 닫고 모르는 척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편이 퇴근해서 오자마자 사정을 얘기하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외면해도 자꾸 신경이 쓰이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차분하게 저녁을 준비했다.
오이를 뽀드득 씻다가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시골에 살 때 바로 옆집에 살던 분이 복숭아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면 가끔 복숭아를 한 바구니 주시곤 했다. 내가 아주 어렸던 어느 해 여름밤에 우리 가족은 마루에 앉아서 옆집 아주머니가 주신 복숭아를 먹고 있었다. 아빠는 복숭아를 먹을 때는 불을 끄고 먹어야 한다며 마루에 불을 끄라고 하셨다. 왜 불을 끄고 먹냐고 물어보면 복숭아벌레를 먹으면 예뻐지니까 꼭 불을 끄고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예전에는 복숭아에 벌레가 정말 많았던 것 같다. 복숭아를 한입 베어 먹다가 벌레와 마주치면 입맛 떨어지니까 아예 있어도 보지 말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러고서는 복숭아벌레는 일부러라도 먹어야 한다고. 복숭아벌레 먹으면 예뻐지니까 많이 먹으라고 말하던 아빠의 말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일 년의 대부분을 술에 취해있던 아빠, 아빠가 술에 취하면 우리 남매들은 이유 없이 맞아야 했다. 그런 나에게도 아빠와 나눈 몇 안 되는 평범한 기억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불을 끄고 복숭아를 먹던 기억이었다.
복숭아를 먹으면서 농담을 하던 그날의 아빠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우리를 놀리면서 웃기까지 했다. 불이 꺼진 마루에 달큼한 복숭아 향이 났다. 코끝으로 모기향 냄새가 스치듯 지나가기도 했다. 나는 벌레를 먹을까 봐 무서워서 복숭아를 들고 어쩔 줄을 몰랐다. 복숭아는 먹고 싶은데 벌레는 질색이고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달콤한 복숭아 향에 참지 못하고 벌레는 없을 거야 라며 복숭아를 한입 베어 먹었다. 말랑한 복숭아의 달콤한 향이 입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벌레 따윈 생각나지 않는 맛이었다. 아빠의 목소리도 복숭아 같았다.
아마 그날 내가 복숭아벌레를 조금 덜 먹은 모양이었다. 더 많이 먹어둘걸 그랬다. 어쩌면 콜라겐과 단백질이 풍부해서 정말 나를 예쁘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알고는 절대 못 먹을 연한 핑크빛이 도는 꿈틀꿈틀 복숭아벌레를 그날 나는 몇 마리나 먹었을까? 그날 아빠는 그렇게 농담을 할 만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여름이 저물어가고 있다. 저녁 바람이 제법 시원해졌다. 아빠가 내게 준 평범하고 평화로웠던 어느 여름밤의 기억이 오래오래 눈썹 끝에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