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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Dec 15. 2021

경단녀 탈출, 아들이 다 했다.

지난주 시청에 아동복지교사 면접을 보고 왔다.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아서 방과 후에 복지센터에 봉사활동이라도 하러 갈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복지센터에서 독서지도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시청 홈페이지에서 보고 바로 응시했다. 경력이 단절된 지 10년도 넘은 아줌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되든 안되든 부딪쳐보자 싶었다.


서류접수만도 쉽지 않았다. 졸업한 지 너무 오래된 대학과 이제는 없어져버린 예전에 일했던 학원들을 이력서에 써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내가 일을 안 한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실감이 났다. 아이들과 어떤 수업을 할 수 있는지 수업계획서 10회 차를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이와 4년 동안 책을 읽고 토론하고 책 놀이했던 자료들이 내 머릿속에, 그리고 아이의 노트와 내 컴퓨터에 쌓여 있었다. 아이가 특히 좋아했던 책들로 수업계획서를 썼다. 떨리는 마음으로 서류를 접수하고 기다렸다. 당연히 안 되겠지 생각하면서도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서류합격 전화를 받았다. 서류합격 전화를 받고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 면접이 남았다는 생각에 김칫국 마시지 말자고 나를 달랬다.


면접을 준비하는 동안 도대체 어떤 질문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머릿속으로 예상 질문을 만들고 예시 답안을 만들었다. 막상 면접에서 내가 예상했던 질문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면접은 그룹면접이었고 면접관은 모두 세 명이었다. 방과 후에 복지센터에 오는 아이들에 대한 태도를 묻는 질문이 많았다. 나는 철저히 내 아이를 대한다는 마음으로 질문에 답했다. 복지센터에 오는 아이들이 취약계층,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면접을 보는 동안 간간히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내 아이와, 내 아이의 친구들과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에 대해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답했다. 면접장을 나오면서 솔직히 망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복지교사에 대해 배경지식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종 합격 연락을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채용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아무리 많이 해도 적응이 안 되는 피 뽑기도 이번에는 슬프지 않게 즐겁게 했다. 채용신체검사라고 의사와 간호사가 말할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말 오랜만에 내가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갑자기 힘이 났다. 정말 열심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활기찬 기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통장사본과 채용신체검사결과지를 시청에 제출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 나는 정말 경단녀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낸 이력서로. 단기 근무 계약직이지만 그게 어딘가. 누가 10년 넘게 육아만 한 나를 써 주겠냐 말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 단박에 경단녀에서 탈출한 것은 모두 아들의 공이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정말 절실하다고 느낀 하나가 바로 독서였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키우겠다고 생각했다.


태교동화는 물론,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된 아이에게 나는 매일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나도 신생아처럼 누워서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림만 있고 글은 없는 책, 입체적인 책은 물론 아이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다치지 않는 헝겊책도 만들었다. 아이는 자라면서 정말 책을 좋아했다. 책을 좋아하는 만큼 나와 남편은 아이에게 정성을 다해 책을 읽어주었다. 책을 읽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 다양한 놀이를 했다. 북 스테이에서 아이가 책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게 했다. 서점이나 도서관을 다니고 도서관이 있는 캠핑장을 찾아다녔다.


아이가 7살 때부터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아이의 친한 친구와 함께 하는 책놀이 시간을 만들었다. 책을 선정하고 책놀이에 필요한 재료도 모두 내가 준비했고 당연히 재료비도 받지 않았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아이에게 좋은 그림책을 읽어주기 위해 나는 스스로 공부했다. 책놀이 자격증을 따고, 아이가 자라면서 독서지도사 자격증도 땄다. 아이를 위해 했던 것들이 단절된 내 경력의 한 귀퉁이를 채웠다. 아이에게 도전의 즐거움을 알게 해 주고 싶어서 공모전에도 더 열심히 참가했고 수상도 할 수 있었다. 아이를 위해 쓴 동화를 읽고 고마운 분이 출판해 주기도 했다. 아이를 위해 했던 10년간의 작지만 꾸준한 시도들이 취업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월부터 나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동안 직장인들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장면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다. 나는 물론 단기근무직이라 점심시간은 없겠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직장인이다. 아이와 읽었던 좋은 책들을 누군가에게 읽어줄 생각을 하니 설레기도 하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이가 2학년 때 매주 수요일마다 학교에 가서 책 읽어주는 엄마 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이들은 책 읽어주는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내가 한권만 읽어주면 한번 더 읽어달라고 하기도 해서 여러 권을 챙겨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집중해서 듣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떤 책을 읽어줄까?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할 생각에, 나도 뭔가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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