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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25. 2024

책, 인질이 되다.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나는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다. 선행학습은커녕 집 근처 공부방에도 가지 않고 아들은 또래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유로운 중학교 2학년 생활을 보내고 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언젠가 문득, 아들이 학원에 가야겠다고 하거나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아직은 그런 조짐이 없다. 앞으로도 그런 마음이 들 것 같지도 않다. 슬슬 불안해오기 시작했다. 시험을 망쳤어 집에 가기 싫었어라는 마음조차도 먹지 않고 아들은 시험을 망치고 당당히 성적을 카톡에 남겨주신다. 고맙다. 그래 시험을 못 봐도 엄마한테는 뭐든 말해주니 고맙다. 어느새 2학년 세 번의 시험이 끝났다. 게임시간도 일주일에 2시간 안팎인 아들은 도대체 무얼 하느라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 걸까? 무의미한 휴대폰질(스마트폰에 인스타도 네이버도 유튜브도 없는데, 게다가 게임 하나 깔려 있지 않은데 무얼 그리 보고 있는지 그야말로 무의미한 폰질이다.)과 뒹굴거리면서 책 보기가 아들이 남들 학원가는 시간에 집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다.


아들에게 말했다. 시험성적이 나쁜 것은 괜찮아. 그런데 노력을 안 하는 것은 괜찮지가 않아. 그러니까 노력은 해줬으면 좋겠어. 아들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의 생활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뭔가 이 평화를 깨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들에게 하루의 공부계획을 세우라고 했다. 아들은 공부할 분량을 정했다. 그대로 지키겠다고 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지켜봤다. 부모의 가장 큰 자질은 아들을 기다려주고 그저 지켜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리고 알았다. 나는 부모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결국 나는 아들을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들을 게임으로 협박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들에게 네가 할 일을 다하지 않으면 일주일 2시간도 안 되는 게임시간마저 없어질 거라고. 아들은 그러겠다고, 그렇게라도 게임을 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스스로 게임을 멈추면 좋으련만.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생각이었다. 아들에게 삼일 연속 스스로 정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전독시(전지적 독자 시점)를 한 권씩 팔아버리겠다고 했다. 아들은 다른 건 몰라도 집에 책이 없어지는 것을 싫어해서 옛날부터 나는 가끔 집에 있는 책 다 갖다 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곤 했다. 그러면 아들은 게임중지보다 두려워했다. 게임은 어차피 일주일에 두 시간, 주말에만 하는 거라 못하게 돼도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에게 하루라도 책을 읽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싱숑 작가님의 웹소설 전독시에 빠져서 20권 전권을 사서 보물단지처럼 읽고 있다. 20권을 8번을 완독하는 것도 모자라서 9번째에 접어들었다. 나는 2학기가 끝날 때까지 전독시를 읽는 모습이 보이면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었다. 아들은 책을 집어 들면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를 못한다. 최근에는 해외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읽어야 한다면 2권을(더 챙기고 싶었지만 아빠와 내가 강력 반대해서) 챙겨갔다. 그리고는 바닷가뷰가 예쁜 수영장이 있는 호텔방에서 8번이나 읽은 책을 마치 처음인양 맛나게도 읽기 시작했다. 그런 책이니 내가 책을 팔겠다고 하면 아들은 게임중지보다 겁을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책만 읽는 것은 아니다. 다른 책들도 읽지만 판다고 협박했을 때 가장 아까워하는 것이 '전지적 독자시점'이라 이 책으로 협박하는 것이다.


아들에게 책으로 협박해놓고 보니 책이 인질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마 그 책들이 내 이런 협박을 들었다면 바들바들 떨면서 제발 다른 곳으로 팔려가는 일이 없도록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제는 그만 책꽂이에서 편히 쉬고 싶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해외여행에서 침대에서 뒹굴뒹굴 책만 읽는 아들을 보면서 급기야 남편도 아들에게 강하게 한마디 했다. 다음부터는 여행 갈 때 책금지라고. 아들은 한권만이라도 허락해 달라고 하는 웃기지도 않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들의 게임시간이 적어서 책을 인질로 협박하는 것이 가능한지, 아니면 그냥 아들은 책을 게임보다 좋아하는 것인지. 아마 전자일 것이다. 아들에게 게임을 무한 자유롭게 허락했다면 공부는 당연하고 책을 읽는 모습도 보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은 스스로 정한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책이 팔려나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한 채 공부하고 있다. 삼일 연속 지키지 못하면이라는 단서가 독이 됐는지 아들은 하루공부를 미룬 채 읽은 책 또 읽기를 하고 있다. 아들에게 책을 인질로 협박이 가능한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 공부와 독서 사이, 공부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랐던 마음이 나도 모르게 변하고 있다. 공부도 잘하고 책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낯설다. 책이라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게 성적 욕심을 버리자고 나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책꽂이에서 언제 팔려나갈지 모르는 책들이 바들바들 떠는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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