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방학을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 전쟁도 막는 나이 열다섯의 반이 지나가고 있다. 아들은 때로는 끓는 물처럼, 때로는 고요한 호수바닥처럼 이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 나는 아직 우리 사이에 별 문제는 없다고 여기고 있다. 아들이 자신의 성적표를 보여줬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성적표를 부모에게 아무 감정의 동요 없이 보여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 아들은 어떤 성적을 받아와도 내가 전혀 화내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아들의 오랜 경험으로 생겨난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들 생애 입시에 들어가는 첫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의 결과가 성적표에 있었다. 처음이라 정말 긴장했던 중간고사, 네 과목을 봤지만 아들은 많이 힘들어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아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첫 번째는 자기 친구들이 생각보다 시험을 잘 봤다는 것이다. 매일 게임하고 놀고 컴퓨터 하느라 새벽까지 안 자다가 지각하던 아이들의 백점 소식은 아들을 놀라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 비 오는 날 달팽이 잡으면서 놀던 개구쟁이 친구가 자기보다 훨씬 시험을 잘 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두 번째는 자기가 시험을 이렇게 못 볼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자기가 시험을 꽤 잘 볼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들의 자신감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중학교 입학할 당시에 봤던 배치고사에서 아들은 반에서 유일하게 올백을 받았다. 아들이 중간고사에 올백을 받지 않은 것보다 입학 당시에 봤던 배치고사 점수가 더 놀라웠다. 학원 한번 가 본 적 없는 아들이었다. 집에서 인강을 듣거나 문제집을 열심히 푼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공부나 성적에 예민해서 아이를 다그치는 타입은 아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사준 문제집이 있긴 했지만 한 권도 다 풀지 않고 쌓여있기 일쑤였다. 정말 이렇게까지 아들이 공부를 안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이 천재는 아니지만 성실하기는 할 거라는 믿음이 깨졌다.
그런 아들이 올백이라니 믿기 힘든 결과였다. 그때 나는 아들을 많이 칭찬해 줬다. 아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뭐 그럴 수 있죠라고 말하고 쿨하게 제 할 일을 했다. 그래도 그때 아들은 내심 속으로 기분도 좋고 나름 자신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중학생답게 쿨내를 풍겼을 뿐. 그런데 중학교 1학년부터 아들은 힘들어했다. 수학 단원평가를 보면 많이 어려워하고 점수도 낮게 나왔다. 다른 과목은 괜찮은데 수학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집에 와서 공부를 하거나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중2에 보게 될 시험을 생각하면 나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여전히 문제집 하나도 온전히 다 풀지 않는 아들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중2가 되고 첫 중간고사 점수에 사실 나는 만족했다. 사교육의 나라 한국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아들의 점수는 기대 이상이었다. 네 과목 중에 백점 하나, 수학을 가장 많이 틀렸지만 평균은 90점이 넘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 안 해도 늘 백점이었으니까, 배치고사 반 유일의 만점자였으니까 점수가 떨어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과정의 교과 공부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준비하고 혼자서 이뤄낸 결과였다. 나는 진심으로 아들을 칭찬해 줬다.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올백은 무조건 나와야 하는 시험이었다는 주변의 말에도 아들에 대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기말고사는 중간고사보다 더 긴장했다. 중간고사 시험이 쉬웠다는 말이 많아서 기말은 어려울 거라는 말이 돌았다. 여전히 혼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믿어 보고 싶었지만 아들은 집에서 문제집 한번 펼쳐보지 않았다. 작년 겨울에 내가 사준 전독시(전지적 독자 시점) 스무 권을 여덟 번째 읽고 있었다. 틈틈이 내가 빌려온 책이나 아빠가 빌려온 책도 읽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주일에 한 시간 반으로 정해진 게임 시간은 철저하게 지켰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친구들과 채팅하고 통화하는 시간은 출근부 찍듯 성실하게 했다. 기말이 다가올수록 초조하고 불안했다. 점수가 얼마나 떨어질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문제집을 꺼내 책상 위에 두기도 하고, 기말은 어렵다는데 준비 잘하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아들은 성실하게 답하고 가볍게 무시해 줬다.
드디어 기말고사 날이 밝았다. 첫날 시험을 보고 아들의 표정이 밝았다. 생각보다 시험을 잘 본 것이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아들은 밝은 표정으로 집으로 왔다. 여덟 과목을 보는 기말고사에서 아들은 중간보다 성적이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수학도 올랐다. 내가 봐도 아들의 성적은 만족스러웠다. 평균이 기말보다 몇 점이나 올라있었다. 과목이 두 배나 늘었는데 틀린 개수가 한 개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인정해 주기로 했다. 집에서 책 보고 게임하고 채팅하던 아들의 어느 구석에 조금은 노력하는 모습도 있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기말고사에서 아들은 반등수가 10등 이상 올랐을 것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중간고사에서 올백이었던 아이들의 점수가 편균 90점 초반이거나 80점대로 떨어진 아이들도 많았다. 시험 점수가 오른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시험을 어렵게 내겠다던 선생님들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시험에서 오히려 아들은 성적이 많이 올랐다.
내가 생각하는 아들의 성적의 비밀은 책이다. 아들이 게임이나 휴대폰이 없을 때 유일하게 대체할 수 있는 재미가 책이라고 말했다. 휴대폰 사용 시간이 끝나면 아들은 바로 책을 펼친다. 그리고 잠들 때까지 책을 읽는다. 마음 한편에서는 저 시간에 공부 좀 했으면 싶을 때가 많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독서로 단련한 결과가 아들의 두 번의 시험점수가 된 것이다. 책이 밥을 먹여주거나 책 읽는다고 사는데 엄청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책을 아무리 강조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책 보다 학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학원 가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아이들이 많다. 학원에 다닌 아이들의 성적이 아들보다 잘 나온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이 부럽지 않았다. 고작 한두 개 더 맞자고 초등학교 때부터 밤늦도록 학원에서 공부한 시간이 나는 오히려 아깝게 느껴진다. 차라리 나는 그 시간을 아들이 가족과 보내고,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보내는 것이 좋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요즘 아이들은 집에서 뒹굴거릴 시간이 없다. 뒹굴뒹굴, 심심한 시간에 노곤하고 편안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멍 때리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시간이 중요하다. 그러다가 심심해서 책꽂이에서 한 권 뽑아 읽은 책이 의외로 재미있는 꿀득템의 시간이 아이들에게는 필요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럴 시간이 없다. 학원 가고 학원숙제하고 짬나는 시간 틈틈이 게임도 해야 한다. 나는 가끔 아들의 친구들을 보면서 궁금했다. 도대체 저 아이들은 언제 쉬는 거지? 저 아이들의 뇌는 언제나 쉴 수 있는 거지?
책을 읽는다고 시험에서 올백 점수를 받지 못할 수 있다. 학원 다니는 아이들보다 성적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당연히 그 아이들보다 성적이 좋지는 않다. 책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험에서 노력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는 있다. 아들이 지금까지 읽은 책들이 아들의 몸과 마음에 쌓여서 다 풀지 못한 문제집의 공백을 메워줬다. 기말이 끝나고 아들은 또 전독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간중간 내가 읽는 책을 읽기도 한다. 누워서 뒹굴뒹굴 책장을 넘기는 아들은 편안하고 즐거워 보인다. 아이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인물들의 갈등이 고조되고, 인물들은 저마다의 이익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아들은 집에 누워서 온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책이 아이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