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아이들에게 책놀이 수업을 하고 있다. 총 8회로 진행되는 수업인데 3회 차 수업을 하러 갔다. 수업을 준비할 때는 항상 고민이 많다. 어떻게 하면 좋은 책을 아이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읽어줄 수 있을까 매번 긴장되고 불안하다. 한 반에 열명이 넘는 아이들이 신청을 했다. 책놀이 수업이라고 해도 나는 항상 짧은 독서퀴즈나 자유토론을 먼저 진행하고 놀이로 들어간다. 아이들과 책으로 이야기할 때 느끼는 것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구나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안 물어봤으면 어쩔뻔했냐 싶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끝나는 시간이 지났어도 손을 든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을 들어준다. 정말 별 이야기 아닌 것도 있다. 캠핑 가서 놀았던 이야기나 오면서 본 꽃이야기, 심지어 창문으로 산책하는 강아지 이야기까지 쉴 새 없이 손을 든다. 그래도 모두에게 최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주려고 한다. 여덟 살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서 부모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많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가는 엄마의 말이 차갑고 권위적이어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아이가 여덟 살 때 담임선생님은 교실에서 질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물론 많은 아이들과 지내는 선생님의 고충을 모르지는 않지만 한창 모르는 것도 많고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물어볼 것도 많았던 1학년을 아이들은 소통 없이 보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작은 실수도 지나치지 않고 크게 화를 냈다. 벌써 7년이 지난 일이라 지금은 그런 선생님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아들은 그 뒤로 좋은 선생님들과 즐거운 초등학교 생활을 했다.
이번 수업에서 아이들과 읽은 책은 박민희 작가님의 '깔끔쟁이 빅터 아저씨'였다. 나는 이 책을 아주 좋아한다. 아들에게 처음 읽어줬을 때부터 좋아했다. 아들은 이 책을 읽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았다. 빅터아저씨는 하얀색 옷만 입는 결백증 환자다. 청소를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아저씨에게는 친구가 없다. 작은 먼지나 얼룩에도 화를 내서 친구들이 없는데 아저씨는 그게 더 좋다고 한다. 하루는 아저씨가 세탁소에 다녀오는 길에 아주 위험한 사람들과 마주친다. 그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는데 아저씨가 깜빡했던 것이다. 바로 토마토축제날이다. 사람들은 하얀 옷을 입은 아저씨에게 토마토를 던지고 달아난다. 화가 난 아저씨는 토마토를 집어서 던지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한참을 토마토 전쟁을 하고 난 아저씨는 너무 재미있어서 기분 좋게 집으로 온다. 그리고 다음날에 머드축제에 다녀온다. 아이들은 토마토축제에 다녀온 아저씨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좋아한다. 아마 아들이 느낀 카타르시스를 아이들도 똑같이 느끼는 것 같다. 아저씨처럼 누구에게나 강박이 조금씩은 있다. 그리고 강박이 아니더라도 하면 안 되는 일들에 대해 지적받을 일이 많은 여덟 살 아이들에게 이 책은 금기를 깼을 때의 해방감을 준다. 그래서 아이들과 수업할 때는 이 책을 꼭 수업 계획서에 넣는다.
책을 읽고 책상을 붙여서 아이들을 둥글게 앉게 했다. 커다란 전지를 펼쳐서 아이들에게 마구마구 낙서를 하라고 했다. 처음에 아이들은 강아지도 그리고 꽃도 그린다. 하지만 점점 크레파스로 아무렇게나 낙서를 한다. 형태도 질서도 없는 낙서가 커다란 전지에 나름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손에 크레파스가 묻어도, 심지어 크레파스를 마구 부러뜨리고 종이에 으깨도 괜찮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신나게 하얀 종이에 색색의 줄무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전지를 마구마구 찢으라고 했다. 모양도 형태도 필요 없이 마구마구 아무렇게나 찢으면 된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이 그린 낙서를 찢었다. 마치 눈싸움하듯이 친구에게 던지기도 하고 공중에 물을 튕기듯 날리기도 했다.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신이 난 아이들의 소리에 놀란 부모님들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다.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셨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나갔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다고 했다. 여덟 살 아이들이 무슨 스트레스가 그렇게나 많아서 풀지 못한 감정을 짧은 수업에서 풀고 가나 싶어서 짠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이 힘들어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아이들은 싫은 것은 항상 학원, 숙제, 심지어 부모님의 잔소리나 부모님이 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라는 것은 학원 안 가는 것이 항상 제일 많다. 아침 9시에 학교에 가서 저녁 늦게나 학원이 끝나는 여덟 살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할지 생각하면 아이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내가 이 책을 읽어주고, 이런 놀이를 하는 이유가 바로 스트레스를 풀게 하고 싶어서이다. 한 번쯤은 틀에서 벗어나서 아무렇게나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마음대로 해도 되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실패가 없다. 아이들은 빅터 아저씨가 느낀 해방감을 정확하게 이해한다. 그래서 이 책이 아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자신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통해 주고 싶은 것은 즐거움이다. 책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거라고 알려주고 싶다. 요즘은 책을 읽는 사람도, 책을 읽는 아이들도 줄어들었다. 책은 지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루한 것은 책이 아니다. 지루하게 책을 대하기 때문에 지루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책도 즐겁게 읽지 않으면 재미없다. 어린아이들일수록 책을 재미있게 경험하게 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줄고 있다. 물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아이들도 즐겁게 잘 지내는 것을 보면 뭐 책 중요하지 않네 싶다. 책 안 읽어도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잘 가는 거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은 목적이 있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책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많은 감정들을 풀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너무 어린 여덟 살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스트레스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스트레스가 있어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자신도 그런 감정이 자기에게 있는지 모르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렇게 힘든 감정이 쌓이고 쌓여서 겉으로 드러날 때가 되면 정말 아이는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기 전에 먼저 아이의 감정을 읽는 것은 어른들이 할 일이다. 어리다고 아픔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리다고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리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트레스도 받고 하기 싫은 것도 참아야 할 때가 있다. 지금 여덟 살 아이들이 살아갈 수많은 날에 얼마나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될지 생각하면 안쓰럽다. 그런 아이들에게 잠깐 해방의 순간을 준 것 같아서 뿌듯한 수업이었다. 수업 후에 교실을 하얗게 덮은 종이 조각들을 빗자루로 청소하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 수업이 좋은 시간으로 잠시라도 기억되었으면 하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