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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17. 2021

결혼은 17대 1의 싸움이다.

한국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30대 이후의 남녀와 결혼을 했는데 아이가 없는 부부, 그리고 아이를 한 명만 낳은 부모가 듣는 말은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왜 결혼 안 해? 왜 아이를 안 낳아? 왜 둘째를 안 낳아? 아이가 12살이 된 지금도 나는 둘째 낳아야지 하는 말을 듣는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았던 6년 동안 왜 아이를 안 낳느냐고 묻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정말 지겨울 정도였다.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부부도 있을 텐데도 이 질문은 그저 순수한 궁금증이나 할 말이 없어서 지나가는 말로 거리낌이 없어 들어온다.


시댁에서는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둘러대고 친정에서는 내가 아이라면 질색이라고 했다. 지인들이 물으면 나는 내가 정신적 불임이라고 말했다. 정신적인 불임이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내 상황이 그랬다. 몸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불임이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아이를 낳아서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지인들은 너 참 별나다 하는 표정을 짓곤 했다.


결혼을 하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연애는 일대일 개인전이라면 결혼은 단체전이라는 것이다. 나는 시댁에서 17대 1로 맞짱을 떴다. 남편은 친정에 가서 17대 1로 맞짱을 떴다. 명절마다 이러고 나니 우리 둘 다 많이 지쳐 있었다. 친척들이 올 때마다 무심하게 하는 아이와 결혼생활에 대한 훈계에 답해주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결혼하고 두세 달 만에 나는 내가 나에게 저지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친정엄마는 시집살이의 쓰리 보 종합 선물세트를 받은 사람이었다. 혹독한 시어머니와 더 미운 시누이, 무능하고 폭력적인 남편과 덤으로 가난까지.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죽어도 결혼만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누구보다 빨리 나는 스스로를 결혼이라는 제도에 밀어 넣은 것이다. 아니 그때 심정으로 처박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연애가 길었고, 연애 후반이 평화로웠기 문에 결혼을 하고 우리가 싸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3년 동안 우리는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전쟁을 치렀다. 나는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었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고 내가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나를 원망하면서 지냈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멍청하고 나약한 존재인 나를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결혼 3년이 지나면서 싸움은 줄었다. 서로가 어느 정도 포기를 한 것이었다. 화가 줄었거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었다. 결혼한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던 남편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 행복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 우리는 다른 공기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싸우지 않으니까 좋은 적도 있지만 나는 사실 숨이 막히고 속이 곫아서 썩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행복하다니. 나는 그때 진심으로 이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우리가 헤어진다면 남편 때문이 아니라 결혼제도에 맞지 않는 오직 나 한 사람 때문이라고. 앞으로 몇 년은 괜찮겠지만 평생 함께 살 자신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두 달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그랬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눈치를 봤을 것이다. 두 달 만에 남편은 폭발했고 우리는 이혼을 이야기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편은 당시 입주를 몇 달 앞두고 아파트 잔금을 마련하느라 혼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영문도 모르고 내 눈치를 보는 상황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 나도 아무 생각이 안 났다. 하나만 보고 있었다. 이 결혼의 끝이 끝나지 않는 어두운 터널이 될 거라는 확신 밖에 없었다.


남편이 문짝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내고 나서야 우리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단 행복에 대해 너무 달랐던 지금의 상태를 말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에 남편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요즘 텔레비전에 방송되는 동상이몽이라는 프로처럼 정말 결혼은 동상이몽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남편은 우리 둘의 보험금을 줄여서 잔금을 치렀고, 우리는 돈을 아끼기 위해 둘이서 입주청소를 했다. 이사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자정까지 청소를 하고 전셋집으로 돌아오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손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사비를 줄이려고 포장이사를 안 해서 집에서는 짐을 싸야 했다. 그렇게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나는 남편에게 어떤 부채의식 같은 것이 생겼다. 남편이 내가 잘못 선택한 결혼에 걸려든 불쌍한 희생양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부턴가 야금야금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을 말하던 남편이었다. 전셋집 근처 공원에서 세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을 보면 남편은 저런 딸 한 명만 낳아서 키우자며 지나가는 말을 하곤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마음에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 어느 날은 장난처럼 딸 낳을 자신 있으면 해 보든가 라고 도발하기도 했다. 절대 아이를 낳지 않겠다던 34년의 내 몸을, 내 생각을, 내 마음의 소리를 이제는 세포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딩크로 살겠다고 나는 정신적 불임이라고 외쳤지만 나는 서서히 녹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남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 차가운 성질로 어떻게 미친 듯이 요동치는 내 분노와 서러운 시간들을 녹여냈을까? 나는 이사를 하고 세 달이 채 되기 전에 임신을 했다. 그리고 마약보다 치명적이고 위험한 임신에 중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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