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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18. 2021

임신은 확실히 마약 같은 데가 있었다.

내가 아이를 갖겠다고 남편에게 말할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임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나이가 34살인데? 그렇게 쉽게 되겠어? 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살면서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 임신은 그렇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입덧을 하는 여자가 날짜를 세어보고 혹시? 하는 표정으로 엔딩. 이런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날짜를 셀 필요가 없었다. 날짜가 되기도 전에 나는 혹시? 했고 테스트기에 너무 연해서 맞나 싶은 두줄을 보고 병원을 찾았다. 며칠 동안 목에 곰젤리가 걸린 것처럼 이물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는 테스트기로 봐서는 임신이 맞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와서 초음파로는 확인이 안 된다고 피검사를 하거나 2주 후에 다시 오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과감하게 2주 후에 오기로 했다. 주사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굳이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2주 후에 초음파에서 점을 가리키면서 의사가 말했다. 아기집 보이시지요? 글쎄요. 아~^^


임신을 확인한 그 순간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은 축하와 함께 간단한 송별회를 해주었는데 나는 그날 밤 몽환적인 분위기 탓인지 내가 임신을 한 것이 아니라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뭔가 대단한 성공을 하고 일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들 나를 축하해주는 분위기가 그랬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남편도 나를 데리러 와서 송별회에 같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임신과 나의 남편에게 집중되었다. 함께 일하던 나이가 많은 미혼 남자가 유독 부러워했는데 그는 항상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뭔가 짠한 분위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마약 같은 임신에 중독되기 시작한 것이. 그날 내 몸에서 뭔가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사실 나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도 모내기나 벼베기가 한창 바쁠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모를 심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학교가 끝나면 논이나 밭에서 엄마를 거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경기도의 한 도시로 이사를 온 후에 나는 방학에는 엄마가 다니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 학생으로서는 꽤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번 돈으로 결혼자금을 마련했고, 결혼 후에는 아이를 낳지 않는 내가 일까지 쉬면 너무 놀고먹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악착같이 일했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일을 그만두면서도 나는 조금도 놀고먹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는 놀아도 된다고 누가 허락해준 것 같았다.


일을 그만두고 며칠 만에 그분이 왔다. 욱!

냉장고를 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부터 밥을 먹는 것 까지 조금이라도 냄새가 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며칠을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누워있어서 일어날 때는 바닥이 핑 돌았다. 남편은 뭐라도 먹이려고 애를 썼지만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입덧으로 몇 달을 보내는 동안이 아마 내가 커피조차도 마시고 싶어 하지 않던 유일한 시기였던 것 같다. 입덧은 고통스럽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는 자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서 행복하다고 느낀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편과 연애를 하거나 신혼여행을 갔을 때도 좋았지만 마음으로 행복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입덧으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임신은 강력한 마약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은 가라앉는데 마음은 붕붕 떠 있었다. 한 번도 마약이나 비슷한 것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내가 임신을 한 그 상태가 바로 마약에 취한 상태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입덧은 4개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맘 카페에서 임신한 사람들이 노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보건소에 당당하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산모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산모요가를 하면서 자연분만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남편이 퇴근을 하면 한 시간 산책을 하고 국수를 먹거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소파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아이에게 태교책을 읽어 주었다. 마치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찍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입덧이 끝나고 6개월부터 임신소양증으로 고생을 했다. 목 주변에서 가슴까지 빨갛게 부어오르면서 가려웠다. 병원에서 연고를 처방해줬지만 나는 차가운 수건으로 열을 식히고 버티려고 애썼다. 긁거나 손을 대면 더 심해져서 가렵지 않은 척 생각조차 안 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낮에는 그래도 찬수건을 대고 있을 수 있었지만 잠이 들면 가려워서 잠에서 깰 정도였다. 잠결에 손을 댔는지 뜨겁고 가려워서 며칠을 자다가 일어나서 펑펑 울기도 했다. 임신기간 중에 소소한 많은 증세가 있었지만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나는 임신기간을 충분히 즐겼다. 임신에 취해 있었다. 임신 기간 마지막 두 달은 역류성 식도염으로 가슴 통증이 심했다. 목부터 가슴까지 타는듯한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심해져서 출산을 하는 순간까지도 통증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출산하면 나아진다고 했는데 정말 출산하고 바로 없어졌다. 역시 임신 대단했다.


임신을 확인하고 아이를 출산하기 전까지 아프지 않고 잠든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평소의 나라면 견디기 힘들었고, 견디느니 차라리 그만 살겠다고 했겠지만 나는 그때가 내 인생 최고로 행복했다. 내 몸에 생명을 품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뭔가 우주를 몸에 품고 있다는 위대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고통이나 불합리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임신기간 동안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50대 후반의 아주머니였다. 남편은 노약자석에 앉으라고 했지만 나는 노약자석에 앉아서 불편하게 가느니 마음 편하게 서서 가는 쪽을 택했다.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어떤 할아버지가 내 무릎을 툭툭 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임산부석이 따로 있어서 마음 편하게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우주를 품은 존재라는 환각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신기간 중에 몸이 뚱뚱해지니까 남편은 나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기간에 내가 내 평생 가장 예뻤다고 생각한다. 피부가 뽀얘진 것 같았다.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광채가 났다. 아마 내가 임신에 취해서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그때 나는 예뻤고 D라인조차도 예뻤다. 임신은 정말 강력한 마약성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언제 자살할 지 몰라서 연애기간 동안 몇 번의 이별을 통보했던 남편의 말처럼 어둡고 삶의 의지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나를 열 달 동안 웃게 했다. 아이를 출산하고도 나는 임신한 여자들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들 얼굴에서 빛이 났다. 역시 다들 임신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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