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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un 16. 2021

그 섬에 아직 그녀가 살고 있다.

19년 전, 봄에 아버지를 보낸 그해 6월에 나는 그녀의 부고를 받았다. 24살 그녀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지금도 낯선 심장마비가 이십 대 초반에 올 수 있다니. 지금도 그녀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거제도에 살고 있던 그녀는 이제 부산에 머물고 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울면서 어린 며느리의 친구인 나에게 찢어지는 아픔을 쏟아냈다. 마치 며느리가 아닌 딸을 보낸 것처럼.


이리 허망하게 갈 줄 생각도 못했다 아이요. 불쌍해서 우짜고. 불쌍해서 우짜고.


혼자 남겨진 아들 걱정보다는 갑자기 떠난 며느리의 아픈 인생을 위해 울어주던 그분이 친구의 시어머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를 떠올릴 때 항상 그분의 목소리가 함께 떠오른다. 불쌍해서 우짜고.


결혼하고 2년이 지나도 아이가 없어서 점쟁이를 찾아갔다고 했다. 점쟁이는 아이는 안 보이고 몇 달 안에 집에서 나가는 사람이 있겠네 라고 했단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분은 한참을 우셨다. 야물딱지게 살림을 해내던 어린 며느리를 먼저 보내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마지막까지 남은 아들 걱정보다는 어린 며느리의 죽음을 아파했던 그분의 마음이 따뜻하게 내 속에 남았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던 친구는 갑자기 뒤로 넘어지듯 쓰러졌다. 남편이 함께 있어서 병원으로 빨리 옮겼지만 6일을 버티다가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24살의 죽음이 이렇게 갑작스럽고 허망할 수도 있을까?


그 아이와 나는 중학교를 함께 다녔다. 우리는 학교에서 반대방향으로 걸어서 1시간씩 떨어진 마을에 살았다. 학교에서는 친하게 지내지 않던 우리가 왜 갑자기 친구가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키가 작고 얼굴이 가무잡잡하던 그 아이.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도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할 말이 많았다. 저녁을 해야 하는 그 아이를 따라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골길을 걸어 그 아이의 집으로 갔다. 가족들의 저녁상을 차려주고 다시 걸어서 우리 집으로 오면서도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함께 있어서 좋았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기다란 풀을 뜯어서 길가에 핀 꽃들을 건들 걸들 치면서 얘기했다. 우리는 학원을 가거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걷고 이야기하고 울고 웃었다.


비슷하게 불행한 가정이지만 그 아이는 나를 부러워하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 아이는 없고 나는 있는 단 하나, 바로 나에게는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그때 이미 엄마와 언니를 병으로 잃었고, 무서운 아빠와 두 살 위의 오빠, 세 살 아래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그때 이미 한 집안의 살림을 해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능숙하게 밥상을 차리고, 밥을 하면서 틈틈이 빨래까지 손 빠르게 해치우는 아이였다. 불행했지만 그 아이는 어둡지 않았다. 언제나 당차고 씩씩하게 웃어넘길 만큼 그 아이는 웃자라 있었다.


내가 이사를 하면서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그 아이와 연락이 되었다. 이미 그 아이는 결혼을 해서 거제도에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의 남편과 한번 그 아이를 만나러 거제도에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소에 근무하던 그 아이의 남편은 얼굴만 봐도 이미 착했다. 남편과 안정된 결혼생활에 그녀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가을에 나를 만나러 한번 오겠다고 했던 그 아이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가끔 정말 그 아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거제도에 가면 여전히 그녀가 남편과 알콩달콩 살고 있을 것만 같다. 거제도의 조선소가 어렵다는 뉴스를 나는 그 아이의 남편을 걱정하면서 봤다. 마치 여전히 그들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처럼. 나보다 두 살 많았던 어린 남편은 아내를 잃고 빠르게 건조되고 있었다. 몸에도 마음에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바다 냄새를 품은 바람이 불어오던 그 아이의 집에서 보낸 짧은 하루 동안 나는 그 아이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쫓기듯 살아왔던 그 아이에게 세상이 준 짧은 행복이었다. 나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그 아이가 원하던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도 거제도 어딘가에서 마음이 따뜻한 남편과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먹으면서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시간조차도 넉넉하게 가지지 못했던 그 아이가 아프다. 어릴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나는 여전히 철없이 우울하고, 마음이 작아서 불만을 달고 산다. 그런 나를 어느 곳에서 여전히 부러워하고 있을지 모를 그 아이가 아프다. 그 아이보다 내가 더 가진 엄마라는 든든한 존재, 그 아이보다 넉넉하게 가진 시간 때문에 아프다. 여름은 그 아이가 오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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