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사랑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랄드 펴낸 곳 / 도서출판 세시)

by 써니

내가 지금보다 나이가 어리고 결점이 많았던 시절, 아버님께서는 내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셨다. 그 충고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아들아, 네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언제나 이 말을 기억해야 한단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처럼 좋은 환경에서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P. 12


내가 위대한 개츠비, 이 작품에서 단연코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들이 겪게 되는 사건이나 결말을 납득할 수 있게 한다. 이 말은 소설의 화자인 캐러웨이의 아버지가 한 말이다. 캐러웨이는 소설의 주인공인 개츠비와 데이지, 그리고 데이지의 남편인 톰을 지켜보는 인물이다. 독자는 캐러웨이의 시선으로 인물들을 본다.


캐러웨이는 증권업을 시작하기 위해 고향인 서부를 떠나 동부인 뉴욕 인근의 웨스트 에그에 집을 얻는다. 캐러웨이는 웨스트 에그의 맞은편 섬,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는 친척동생인 데이지와 톰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데이지의 친구인 조던 베이커로부터 개츠비에 대해 듣는다. 개츠비는 캐러웨이의 옆집에 사는 엄청난 부자로 밤마다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사람들은 누구라도 개츠비의 파티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파티에 초대받게 되고,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데이지가 개츠비의 옛 연인임을 알게 된다. 닉의 도움으로 개츠비와 데이지는 다시 만나지만, 데이지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톰의 정부인 머틀이 치여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보호하려고 하지만, 머틀의 남편, 윌슨은 개츠비가 머틀을 죽게 했다고 생각하고 개츠비에게 총을 쏘고 자살한다. 톰과 데이지는 개츠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급하게 여행을 떠나고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장례식 후에 다시 서부로 돌아가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왜 위대한 개츠비인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20대에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옛사랑을 다시 만나기 위해 불법으로 부를 얻은 개츠비는 결국 사랑도 잃고, 엉뚱하게 살해당한다. 그런 개츠비의 삶은 그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흘러 다시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나는 개츠비의 내면이 가진 소중한 가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물질적인 욕망을 따르는 데이지를 위해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부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개츠비가 돈을 번 방식은 부정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개츠비의 사랑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개츠비는 5년 전, 데이지를 사랑한 그 마음처럼 여전히 순수하게 데이지를 사랑하고, 그녀가 낸 사고를 자신이 짊어지고 간다.


물질만이 지배하는 것 같은 시대에, 개츠비는 물질을 통해 사랑을 얻고자 했다. 그 방법이 부정하다고 톰은 비웃었지만 그 역시 개츠비보다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고, 아내가 있지만 정부를 만난다. 데이지는 그런 톰을 알지만 떠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데이지의 친구인 조던 베이커는 부정한 방법으로 골프대회에서 우승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정부인 머틀이 죽었을 때 톰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데이지가 사고를 낸 것을 알고 급하게 여행을 떠나버린다.


톰과 데이지는 진실하게 경박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물이나 사람들을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돈의 그늘이나 그들의 무책임한 무관심 속으로 숨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P. 265


톰과 데이지 (나는 여기에 조던 베이커도 추가하고 싶다.)에 대해 이보다 짧지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 구절이 있어 나는 개츠비에게 덜 미안해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야 개츠비! 돈 많고 무례하고 경솔한 인간들 때문에 속 끓이지 말고 이제 편히 쉬어!라고 개츠비의 무덤 앞에서 속삭여주고 싶다.


개츠비가 총에 맞고 죽음에 이르는 짧은 순간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릴 정도로 순진했던 개츠비는 죽어가면서도 데이지를 걱정했을 것이다.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아마 이 사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개츠비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5년 만에 만난 데이지가 5년 전의 사랑이었다고 믿었던 개츠비의 순수함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비극이다. 개츠비가 다시 만난 데이지는 개츠비의 첫사랑이 아니다.

데이지는 톰 뷰캐넌과의 결혼식날 전날 개츠비의 편지를 받고 결혼을 취소하려고 한다.


"여기 있어요." 그녀는 침대에 놓아둔 휴지통 속을 뒤지더니 진주 목걸이를 꺼내 들고는 말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내려가서 누구든지 임자에게 되돌려 줘요. 그리고 모두에게 데이지는 마음이 변했다고 전해줘요. 데이지는 마음이 변했다고." P. 115


손에 편지를 쥐고 이렇게 말했던 데이지는 편지를 조각조각 찢어버리고 나서 다음 날 톰과 결혼을 한다. 나는 데이지가 이 편지를 쥐고 있을 때와 편지를 찢고 결혼할 때를 기점으로 달라졌다는 상상?을 했다. 오래 기다리던 연인의 편지를 하필이면 다른 남자와의 결혼식 전날 피로연을 앞두고 받은 여자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대대로 명망 있는 두 가문의 남녀의 결혼식이라 하객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데이지가 편지 한 장에 의존해서 결혼식을 취소할 있었을까? 데이지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데이지는 소설에서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말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가 수백 명의 하객들과 부모님에게 결혼을 취소한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순간의 이 선택으로 데이지는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운 신부가 아닌 진정한 사랑을 잃고 아픔을 품은 채 결혼하는 신부가 된다. 그리고 데이지는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살게 된다. 톰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알지만 아무렇지 않게 톰과 살고 있다. 아무려면 어때?라는 듯이 데이지는 풍요 속에 몸을 던진다.

-딸이라서 다행이야. 이왕이면 아주 바보가 돼버려라. 이런 세상에서 바보가 되는 게 속 편하다. 귀여운 바보


데이지가 친척인 캐러웨이에게 딸을 낳을 때의 얘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나는 이 말을 할 때의 데이지가 측은하다고 생각했다. 데이지의 결혼식보다 슬픈 장면이다. 개츠비가 없는 5년을 보낸 데이지를 이보다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데이지는 이런 마음으로 톰과의 결혼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예쁘고 바보스러운 여자로 살기로 한 것이다. 데이지를 흔히 욕망으로 부른다. 하지만 나는 데이지가 느낄 아픔을 차마 모른 채 할 수가 없다. 순진한 어린 시절 사랑했던 개츠비와의 사랑을 공허한 웃음 뒤에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츠비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혹은 집착일 뿐이라고 말한다. 데이지를 위해 돈을 모으고, 다시 찾아온 개츠비가 대단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데이지에게도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 사랑을 기다리지도, 지금의 남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살았을 시간이 데이지에게 있었다. 데이지는 이제 울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서 흘릴 눈물이 없다. 그런 데이지는 톰이 결혼하고 싶었던 그녀가 아니다. 개츠비가 다시 만나고 싶어 했던 5년 전의 그녀도 아니다. 그녀는 찢어진 편지다. 찢어진 가슴이다. 찢어진 사랑이다. 데이지는 갈기갈기 찢어진 그녀의 상처를 돈으로 포장하고 있다. 화려한 옷으로 가린 그녀의 가슴은 바보 같은 웃음 뒤에서 울고 있다.

처음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왜 캐러웨이라는 화자가 필요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캐러웨이는 톰이나 데이지만큼이나 부유하지만 경솔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캐러웨이는 개츠비가 이룬 사랑을 비난하지 않는다. 개츠비가 자신들(톰과 데이지, 그리고 캐러웨이 자신)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추기 어려운 퍼즐을 캐러웨이가 완벽하게 맞춰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모두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닉 캐러웨이는 욕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캐러웨이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동부로 이사 오면서도 물질적인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뜨거운 사랑을 품지도 않는다. 조던 베이커와도 호감은 있지만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캐러웨이의 마음은 항상 잔잔하다. 그렇기 때문에 캐러웨이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고민과 기쁨을 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지금, 나는 작가 피츠제랄드가 더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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