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숙차'와 함께한, 시간 대한 이야기들.
처음 검색을 통하여(여자애에게 잘 보이려고) 찻집 'D'를 보았을 때, 그곳의 외관도, 차가 담긴 찻잔의 모습도, 공간의 모습도 모두 인상 깊었지만, 가장 뇌리에 깊게 박혔던 건, 그 글을 작성한 사람이 들었다는 쌤의 말이었다.
금이 간 그릇도, 그 자체로 멋이 있어요.
그 말이 너무 인상 깊어서, 다른 부분을 고민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 쌤에게 두 명이 가는데 예약이 가능한지 여쭤보았었다(그리고 결국은 혼자 갔다). 그 문장을 읽지 못했더라면, 혼자서 그 찻집에 찾아갈 의지는 반으로 줄었을 거라고,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 되돌아보면서 생각해본다.
1월 다회가 있는 날, 여전히 추운 한기가 서울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D'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따뜻했다. 이제는 조금은 익숙한 공간이 된 그곳에서, 처음 'D'에 방문했을 때 만났던 다우와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네. 벌써 시간이 두 달 정도 흘렀네요. 선생님은 연초 잘 보내고 계세요? 그리고 그때 말하셨던 일들도 잘 진행되고 계신 거고요?"
'D'의 첫날, 선생님과 쌤이 안부 인사를 나눴듯, 두 달이 지난 후, 나 역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며 자리에 앉았다. 너무도 빨리 겨울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쌤은 여전히 팔에 보호대를 차고 계셨다. 그리고 여전히 혼자서 움직이시면서 이것저것 준비하셨다. 의사가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다고 했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셨고,
"그러니 오늘도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드릴 테니, 다들 앉아 계세요."
"쌤! 쫌!"
"1월 다회에 와주셔서 다들 감사해요. 오늘은 예전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쌍화차로 시작을 하고, '청차', '보이숙차', '홍차' 순으로 마실게요. 젊은 분들은 쌍화차가 병 음료 말고는 익숙하지가 않으실 텐데, 얼마 전에 지인분이 직접 만든 당유자 쌍화차를 주셔서 이렇게 보여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건강한 맛(이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는 것 같다. 다르게 표현하면 젊은 사람들은 안 좋아할 수도 있는 맛)인 당유자 쌍화차를 마시면서 시작된 다회. 차 수업에 비하면 다회는 확실히 조금 더 즐기는 분위기다. 차를 마시고, 다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수다를 떤다. 찻집 'D'에 처음 온 다우도 있지만, 어색한 분위기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청차인 '대홍포'가 찻잔에 따라지고, 흑임자가 가득한 수단을 먹는다. 수단을 씹는 순간, 안에서 고소한 흑임자가 입 전체로 터져 나온다. 중간중간 씹히는 구기자의 시큼함이 고소함을 배가시킨다. 고소함, 단맛, 시큼한 맛. 굉장히 강향 맛들이 입 안에서 뛰어놀지만, 은은한 향도 있다. 계화꽃. 그 강한 맛들 속에서도 본인의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향들이 지나가고 나면, 대홍포로 입 속을 정리해 준다. 겨울. 겨울. 겨울.
흑임자 수단이 비워지고, 대홍포도 비워졌을 때, 쌤은 다른 자사호를 꺼내오신다.
"다음에 마실 차는 2003년 산인 보이숙차예요. 보이생차도 당연히 좋지만, 전 보이숙차도 좋아한답니다. 보이생차와 다르게, 인공 발효시킨 보이차를 보이숙차라고 불러요. 자연발효시키는 보이생차보다는 아무래도 가격이 더 저렴한 편이에요. 보이생차가 차에 들어간 시간을 인정받는 기분이죠. 그렇다고 보이숙차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호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몸에 어울리는 차를 찾아 즐기면 되는 거죠."
홍차가 'black tea'라고 불린다면, 보이차는 'dark tea'라고 불린다. 특히 보이숙차는 왜 'dark tea'라고 불리는지, 찻잔에 따라보면 여실히 보여준다. 진한 차의 색깔이 그 진한 향을 닮았다.
"자사호는 차의 계열별로 다르게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아무래도 차의 향을 자사호가 머금게 되다 보니, 여러 계열의 차를 하나의 자사호로 우려내면, 서로의 향을 해칠 위험이 있거든요. 자사호가 저렴한 편이 아니죠? 그래서 차를 처음 접하실 때, 자사호를 바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주로 즐길 차의 계열을 먼저 찾은 후, 그다음에 자사호를 구매하시는 게 좋아요."
보이숙차의 향이 찻잔으로부터 내 코까지 강하게 올라온다. 먼지향, 흙향이라고 느껴지는 그 묵직한 향이 찻집 'D'를 채운다. 차의 향을 즐기고, 입을 대본다. 역시 꿉꿉한 느낌의 향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처음 차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들 수 있는 향이지만, 마시다 보면 즐기게 되는 그 향이다.
"보이차는 2~3번째 내릴 때, 그 차의 본연의 향이 가장 잘 살아납니다."
첫 잔을 비우고 받아 든 두 번째 찻잔부터, 그 꿉꿉한 향이 많이 줄고, 차의 본연의 맛이 살아난다. 그래도 다른 차의 향보다는 개성이 강하기에, 강한 느낌의 다식이 입에서 당긴다.
"빵과 함께 드시면 좋을 거예요."
빵 가운데에, 토마토와 치즈가 가득 들어있다. 향이 강한 치즈가 보이숙차와 정말 잘 어울린다.
빵과 보이숙차를 즐기고 있는 사이, 자사호에 대한 질문과 이야기가 옆에서 이어진다. 'D'를 처음 방문한 다우가 쌤에게 말을 꺼낸다.
"가지고 있는 자사호가 있는데, 금이 간 것 같아요. 혹시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고칠 수는 있어요. 그런데 새로 사는 가격만큼 비용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오래 써오던 거라서......"
그럼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새것도 좋지만, 오랜 손길이 유지되는 걸, 전 더 좋아하거든요.
두 분은 자사호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자사호가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얼마 전에 완전히 깨져버린 쌤의 자사호 이야기도 대화 중에 껴있다. 그리고 자사호를 이야기하면서, 본인들이 차를 마셔온 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주제는 물건에 대한 이야기지만, 듣다 보면 기물에 담긴 시간에 대한 대화이다.
"저 블로그에서 쌤이 하신 말이 마음에 남아서 'D'에 오게 되었어요."
"네? 제가 한 말을 누가 블로그에 올리셨어요?"
"금이 간 그릇도, 그 자체로 멋이 있다고 하셨다고 적었더라고요."
"어머! 내가 그런 멋진 말을 했었다고 해요?"
쌤은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지만, 그날 들은 이야기를 반추해 봤을 때, 그 말을 직접 하지 않으셨더라도, 이미 행동에서, 그리고 그 평온한 말에서 그 문장을 몸으로 행하고 계심을 보여주시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D'에서 나누고 있는 이야기 역시, 쌤의 공간 어딘가에 있는 물건에 스며들었을 것임을,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