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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to Apr 18. 2023

'연'이란, 어디에 존재하기도,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사람 #04] K의 이야기

K가 I를 처음 본 건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있는 한 도시에서였다. 순례길의 특성상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사람들은 길이 끝날 때까지 마주칠 확률이 높다. K도 그런 연유에서 I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I가 2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시간을 지내고 있었다면,
K는 40대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I가 K의 말을 듣기에는 치기 어렸고, K는 I가 유치해 보였다. 그럼에도 일정상 그들은 10일의 시간 동안 300Km의 길을 함께 걸었다.

 


여름 산티아고 순례길의 하루는 조금 일찍 시작한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야, 2시의 땡볕에서 걷지 않고 그다음 숙소(Alberge)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잠시 낮잠(Siesta)을 즐기고 일어나 마트에 가서 순례자들끼리 십시일반 재료를 사고, 숙소에 돌아와 함께 요리해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물론 가벼운 술과 함께.


 

I와 K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술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여행을 좋아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걸을 시간은 많았고, 이야기를 할 시간은 더 많았다. 그들은 서로 편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하게 대화를 나눴고,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한 날, 그들은 헤어졌다. I는 피니스테레(Finisterre)를 걸쳐 묵시아(Muxia)아 까지 돌아보기를 원했고, K는 거기서 스페인 남부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다만 I는 K에게 이런 인사말을 남겼을 뿐이다.


연이 있다면 또 뵙겠습니다.


 

6개월 후, I는 친구들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nnapurna Base Camp - 약칭 ABC) 트래킹을 떠났다. 처음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기에 I는 긴장했고, 혼자 하는 여행보다 훨씬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카트만두(Kathmandu)에서 일행들과 만나고 난 후 이동한 포카라(Pokhara)에서 I와 그의 일행은 좀 더 저렴한 숙소를 찾기 위하여 페와(Phewa) 호수의 가장 안쪽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 들어갔다. 여행책자에는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표시된 지역까지 들어갔을 무렵, 그들은 한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냈고, 거기에 짐을 풀게 된다.


 

숙소 외부에서 점심을 먹고 들어온 I의 일행과 숙소의 사장 부부, 그리고 다른 여행자들은 간단하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의 I 일행의 일정에 관하여, 그리고 다른 여행자들의 모험에 관하여. 그 와중에 거실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한 사람이 I에게 '머리를 이쁘게 잘랐다며' 말을 건넨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될 확률은 얼마일까?



그리고 그 지구 반대편에서 1/3을 돌아온 어딘가에서, 6개월 후에 다시 마주칠 확률은 또 얼마일까? K와 I는 길 위에서 그렇게 재회했다.


 

K는 I의 일행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었다. I 역시 K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넘겼다. I의 일행이 ABC 트래킹을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K는 기다렸고, 함께 카트만두로 넘어와 마지막 저녁으로 스테이크를 함께 먹었다. 그전에 하지 못했던 연락처 교환과 함께.


 

K는 다합(Dahab)으로 넘어가 스쿠버 다이빙을 즐겼다. I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6개월 후 다시 피렌체(Firenze)로 떠났다. 그때까지 그들은 서로 연락을 이어나갔지만, K가 다이빙 중에 핸드폰을 물에 빠트린 후, 더 이상 그 둘은 연락하지 못했다.


 

I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K에게 남겼던 인사말은, 사실 I가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 말에는 이러한 의미도 숨겨져 있었다.



“연이 있다면 또 뵙겠습니다. 하지만 전 연이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서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볼일이 없겠죠. 그러니 서로에 대해서만 좋은 추억만 남기고 다음 재회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맙시다.”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만난 K 덕분에 I는 인연의 무서움과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그 후 인사말의 숨은 의미를 조금 바꾸었다.


연이 있다면 또 뵙겠습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PS. 형님. 여전히 길 위에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쌓아오셨을까요. 가끔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인연이란 붙잡으려고 하면 흩어지고, 무심했을 때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기대한 인연이 아닐 수도 혹은 기대했던 인연이 안 잡힐 수 있다는 게, 슬픈 부분으로 남아있긴 하지만요. 그때 덧붙이지 못한 인사말 여기에 적어봅니다. 항상 행복하시길.



Erich Heckel, 'Mnnerbildnis',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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