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영혼' 한가운데에서 트래킹 하기 : 캐나다, 레이크 미네왕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충격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캐나다에 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적응도 하지 못한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마주한 겨울의 미네왕카 호수. 캐나다 살이 세 달 째인 지금은 로키 산맥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서울에서 방금 날아온 나에게 그 차가움과 웅장함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놀라움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투명하고 맑게 얼어버린 호수의 물, 그 옆을 끝없이 둘러싼 눈 덮인 산맥, 그리고 가파른 절벽 옆의 작은 트래킹 길을 오직 아이젠만을 믿고 걸어갔던 시간.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어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던 날.
뒤에 오는 친구가 자꾸 말을 걸어서, 혹은 영어로 대화를 하느라, 아니면 경치에 감탄하느라, 또 사진을 찍느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현실감이 없이 붕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은 이 중 무엇 때문일까.
물의 영혼, Lake Minnewanka
미네왕카 호수는 라코타 원주민 언어로 '물의 영혼'이라는 뜻이다. 왜 원주민들이 이 호수에서 영혼을 떠올렸을까, 이 질문은 광활한 풍경을 마주하자마자 납득되었다. 무서울 정도로 거대하고, 차갑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우리는 초월적인 존재를 떠올린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다시 말해 경외심을 가질 때 이를 신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구의 모든 것들에는 힘과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었던 라코타 족은 마찬가지로 이 거대한 호수를 보면서 영혼을 떠올렸겠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호수 속 물의 영혼을 떠올리면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
미네왕카 호수는 캐나다 밴프의 동쪽에 위치하며, 빙하를 그 기원으로 하는 깊이 약 142m의 거대한 호수이다. 캐나다 로키 산맥에서 두 번째로 긴, 약 21km의 길이를 자랑하기도 한다. 약 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는 토착민들이 거주해왔는데, 엘크나 곰, 사슴 등의 다양한 생태계가 보전되어 있고 손쉽게 사냥을 위한 석기를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천혜의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이 호수에서의 스포츠는 꽤나 유명하다. 겨울에는 크로스-컨트리 스키의 성지이자, 트래킹과 스노우슈잉의 참맛을 알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여름은 겨울보다도 훨씬 성수기인데, 밴프 국립공원의 웹사이트에서도 보통 주차장은 만석이라고 소개할 정도이니 그 인기가 실감된다. 여름에 할 수 있는 스포츠는 호수에서의 카누잉, 보트 타기, 낚시,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이킹. 8월에도 6도에서 20도를 왔다 갔다 하는 시원한 날씨이기에 피서지로도 제격이다.
미네왕카 호수를 보러 가는 길
미네왕카 호수까지는 캘거리에서 차를 타고 1시간 20분이 걸린다. 해뜨기 전에 사람들과 만나 차를 타고 가며 슬며시 잠들었는데, 문득 눈을 뜨니 붉은 일출에 비친 로키산맥이 보였다. 캐나다에 도착한 후 처음 가까이서 보는 암벽 산. 운전하는 친구가 깔아 둔 잔잔한 컨트리 음악, 잠에서 방금 깬 몽롱함, 그리고 아무 생각 없다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설렘에 한가득 행복해졌다.
도착해서는 미리 신고 온 등산화의 끈을 묶고 아이젠을 끼며 트래킹 준비를 했다. 폭이 1m도 되지 않는, 눈 덮인 절벽길을 걷기 때문에 아이젠은 필수다. 해가 뜨고 기온이 오르면 녹은 눈이 얼음이 되어 신발에 달라붙는데, 그럼 더더욱 미끄럽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막 해가 뜬 다음이어서, 한겨울 추운 날씨에 대비해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모자와 장갑까지 들고 왔지만 사진 찍을 일이 많아 장갑은 끼지 못했다.
색감 보정 하나 없이 카메라 그대로에 담긴 미네왕카 호수의 모습. 이 거대한 풍경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돌 같은 차가움'이었다. 겨울 아침이어서 그런지 주위가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했는데, 특히 아주 두껍게 얼어 있는 얼음은 여름의 생동감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새 한 마리도 날아들지 않을 것처럼 고요한 돌산는 무서울 정도였다. 밤에 보는 이 호수와 산은 얼마나 더 두렵고 신비스러울까! 그렇다고 해서 밤까지 이곳에 머물 용기는 없지만......
미네왕카 호수 트래킹 코스는 호수 주변의 다양한 풍경까지도 아우른다. 얼어붙은 물 위로 직접 올라갈 수 있는 낮은 지대부터, 숲 속을 거쳐 가파른 절벽길까지의 모든 길은 두터운 눈으로 덮여 있었다. 사람 발로 다져진 부분은 얼음이 되어 단단하지만, 한 발자국만 옆으로 가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이다.
발걸음 하나에 집중해 숲길을 지나다 어느 순간 옆을 보면 기가 막힌 풍경이 온 시야를 덮는다. 나뭇잎 하나 없는 가지들은 앙상하지만 사람이 많이 지나지 않는 곳의 나무들은 온통 눈을 가득 덮고 있어 오히려 여름보다 풍성해 보인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 호수의 풍경 중 하나는 얼음이다. 투명하게 얼어붙은 호수는 신기하게도 퍼런 빛을 띤다. 남색이라고 하기에는 푸른빛이 더욱 돌고, 파란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차가운 호수의 빛깔. 조금만 떼어내어 목걸이를 만들면 안 될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산에서 먹는 김밥은 언제나 꿀맛! 한식이 그리워질 즈음이었기에 하이킹에 가면 꼭 김밥이 먹고 싶어서 전날에 미리 만들어 놓고 잤다. 추운 겨울에 등산하느라 아주 차가워진 김밥이었지만 식용유 듬뿍에 고루 익힌 당근과 계란 지단의 조화가 훌륭했다. 미네왕카 호수를 바라보며 먹는 점심이라니, 시각부터 미각까지 가득 찬 든든함은 덤이다.
놀랍고 행복했던 5시간 가량의 트래킹 덕분일까, 돌아오는 길에서는 새벽보다도 더 깊은 잠에 빠져 허우적댔다. 처음 만나는 인도 친구들과도 등산을 하며 친해지고, 캐나다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경험했고, 마음에 드는 사진들도 잔뜩 찍었던 하루였다.
캐나다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나는 매일 놀랍고, 신기하고, 행복한 하루들을 쌓아간다.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이런 황홀한 기억들을 가질 수 있었으니 오히려 좋다. 이곳에서 살면서 배우는 것은 어디든 가까이 있는 대자연과의 만남, 그 속에서의 여유, 이 덕에 얻는 마음의 평화. 캐나다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