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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꼬 Feb 28. 2023

시골 유학을 위해 야반도주하다

객기와 용기 사이

게으른 본성을 이기고 꾸물거리며 준비했지만 6일의 시간은 너무 부족했어요. 두 아이를 위해 한 동안 가지 못할 병원 투어와 소소하지만 중요한 송별회들로 시간을 써버리, 정작 짐을 싸려는 순간에는 내일의 나에게 미루다 보니 결 이사 전날이 되었네요.


차 두 대에 실어 내려갈까 하다가 세탁기를 서울서 중고로 구매하면서 용달 이사를 준비하게 되었어요. 전날 급하게 당근으로 이사박스 8개를 고, 난방이 되지 않는 부엌 겸 거실을 위해 등유 난로도 습니다. 방 전기 패널이라 웃바람이 있을 것 같아 급하게 온풍기도 하나 샀죠. 이렇게 구매에 시간을 쓰다 보니 짐 쌀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았더랬습니다.

다 찍지 못한 짐들

그래도 욕심쟁이답게 8개의 이사 박스를 다 채우고 집에 있는 다른 박스들을 이용해 짐을 쌌습니다. 1톤 트럭에 남는 공간 없게 하겠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을까. 진정한 멕시멀리스트의 시골 방 하나 주방 하나 채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맹주 하는 리더마냥 짐을 싸대고 보니 집안이 휑해진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밤 12시가 넘었네요... 괜찮습니다. 용달 기사님은 낮 1시쯤 오시기로 했으니깐요. 피곤하지만 소풍 전날 잠 못 드는 처럼 왠지 쉬이 들지 못했습니다. 40대 중반 큰 삶의 변화 앞에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 섞여 뭔가 내일이 오는 게 오롯이 설레지만은 않는다는 것이 소풍때와는 른 느낌이었지만요.




겨우 잠들어 아침이 되고, 마지막 등원을 시키면서 선생님께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점심 먹고 데리러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집 정리도 하고, 넉넉하게 주유도 하고, 세차도 하고 나니 1시가 좀 안되었네요. 이렇게 계획적으로 오전이 만족스럽게 마무리되던 찰나 용달 기사님이 연락이 오네요.


"죄송한데 앞일에 금전적인 문제가 발생해서요.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어쩌죠?"


결국 2시 도착하셨고, 많이 미안해하시는 모습에 연신 괜찮다며 식사 전이라시길래 점심 드시고 천천히 출발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희도 어차피 중간에 애들 때문에 휴게소는 들러야 하니깐요.


차를 타고 가는데 살짝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가 드디어 일을 쳤구나.'

'객기였나? 용기였나...? 그 중간쯤인가?'


눈앞으로 당장 몰려드는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인지 붕 뜨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지르고 처절하게 수습하고 있는 미래의 내가 애처롭게 현재의 저를 쳐다보는 착각마저 듭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차를 돌려.'


이번 건은 일을 크게 치긴 쳤나 봅니다. 오히려 비현질적으로 은혜로워 보이는 하늘 때문에 현실로 돌아왔네요.



어쩜 이리 여유로왔을까요. 비를 찍어 보고서야,  중간에 들른 휴게소 이후 늘어난 시간을 보고서야 아찔해졌습니다. 밤 8시를 훌쩍 넘겨서야 도착하게 되는 걸 인지하고 나서야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뭐 어쩔 수 있나요. 막힌 길을 뚫어버릴 수도 없고 날갈 수도 없으니 잔뜩 짐을 실은 차 안에서 지는 해를 보고 마냥 갈 수밖에요. 예쁜 노을에 위안받으면서요.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저 멀리의 어딘가에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야반도주한 일가족같이 조용조용 짐을 욱여넣습니다. 대충 잘 자리만 남겨놓고 마냥 짐을 쌓았어요. 밤에 이사를 하는 경험도 지금 아니면 못하겠죠? 미리 주문해 두었던 매트를 깔고 잠을 청해 봅니다. 이 짐들을 어떻게 할지는 내일의 나에게 부탁하면 되니깐요.


제처럼 오늘도 잠이 잘 들지 않는 밤입니다.



(예고) 다이소에서 십 만원 쓰기, 백반맛집, 마당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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