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솔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용기
(이전 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부동산 경매 공부 시작했냐고요?
아니요.
마음먹는다고 어떻게 바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내일 출근할 내가 버거운데 말이죠.
출근해서 환자들 history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지, 늦잠 자진 않을지, 시술/수술이 많아서 허덕이진 않을지. 온갖 걱정으로 뒤덮여 눈알이 피곤하고 심장은 두근두근한 상태로 잠이 들곤 했어요.
출근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시작해서, 인수인계 전 환자들의 약을 싸고 환자 파악을 하고 환자 라운딩을 돌기까지. 어깨가 치일 정도로 환자들이 빽빽한 로비와 병동의 공기, 나 자신을 억누르는 마인드가 상기되고 호흡이 가빠지는 긴장감을 저에게 지속적으로 주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니, '너무 다 잘하려고 했나? 내가 능력이 안되는데 끌고 가려니까 힘든 건가?'라는 생각도 들어요. 요즘엔 '두려움을 내가 마주하지 못하나?'라는 생각도요. 기숙사 욕실 한쪽에 놓여있는 첫 입사 날 올리브영에서 사 온 커다란 샴푸를 보고 '이거 다 쓰면 1년이 지나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샤워할 때 3-4번씩 펌프질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덕분에 화장실은 뽀글뽀글 샴푸향기로 항상 가득했죠. 어차피 그래도 시간은 똑같이 흘러가는데 나름의 위안이었나 봐요. 나의 성장, 삶의 가치에 대한 기대 없이 경력 채우기에 몰두한 간호사 생활은 끝없는 터널처럼 느껴졌어요.
오늘 <린치핀>이라는 책을 읽는데 딱 눈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어요. 6년 동안 한 카페에서 일한 데이비드 얘기. '데이비드는 자신의 일을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객들과 하나하나 교감하는 것이 그의 예술이었다. 고객들의 기분을 바꿔주고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들어줄 수 있는 기회였다.'
처음엔 '와, 사소한 일도 저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10분 후, 왠지 모를 찝찝함에 다시 돌아가 읽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내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구나.
저 구절을 읽고 '신규 간호사 때 내가 저렇게 긍정적이지 못해서 버티지 못하고 퇴사한 걸까? 저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저 얘기는 데이비드의 이야기일 뿐, 내 감정이 아니잖아요. 갑자기 환자가 퇴원 결정돼서 처방이 수십 개 나고 있는데 보호자 3명이 동시에 나와서 "금식 왜 이렇게 길어요? 검사 시간 당길 순 없어요?", "여긴 왜 이렇게 더워요?", "밥 왜 아직도 안 와요?"라고 물어보는 상황. 이 순간에 과연 '환자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간호해야겠다.'라는 생각을 못했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걸까요?
긍정적인 마인드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간호사'가 되려는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저에 대한 죄책감을 접었어요. 그리고 다시 솔직하게 들여다봤죠.
나는 힘들었고 그 상황이 싫었구나.
그렇게 하루하루 샴푸 펌프질을 하다 보니, 1/4이 남았을 시점인 1년 3개월. 병동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큰 계획을 세우고 퇴사를 한 건 아니에요. 60% 정도 남아있던 나에 대한 자신감 하나로 하게 되었죠. 어차피 간호사는 이미 저에겐 경제적인 '수단'일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평소 관심 있던 부동산을 업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공인중개사 시험이 6개월 남았을 시점, 덜컥 에듀윌을 결제해 버립니다. 역시 공인중개사 합격은 에듀윌인가요! 신기하게도 제 주변 사람들이 공인중개사 시험을 2명이나 준비 중이었어요. 저희 엄마와 남자 친구. 그냥 얼떨결에 같이 공부를 하게 되었고, 3명 모두 합격의 기쁨을 누렸네요. 그래서 지금 공인중개사 하는 거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