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대체 불가능한 나를 만드는 법
"그냥 내가 해봤으니까 그래!"
"일단 해보니까 되던데?"
이 말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답답했다.
저는 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석사에서 그린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 지금까지 제 삶과 사업의 기반은 늘 디자인이었어요. 특히 감각적인 것을 중시하는 패션디자인 분야에서 오래 일했죠.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사고할까요?
시각적인 것에 강합니다. 상상력이 풍부하죠.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것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소비자나 클라이언트에게 판매되는 제품을 디자인하기 때문에 대중의 생각, 클라이언트의 의도도 잘 파악해야 해요. 그래서인지 이론에 기반을 둔 사고보다는 직감과 영감에 의한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죠.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요.)
사업도 그렇게 했어요. 마치 디자인하듯이.
갑자기 떠오르는 영감을 바로바로 목업 만들듯이 일단 해보고, 고치고, 안 되면 다르게 해보고. 이런 방식이 사업과 아주 잘 맞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게 바로 린스타트업이었습니다.
린스타트업: 최소한의 자원으로 빠르게 실험하고 학습하며 사업 모델을 검증해 나가는 창업 방법론. 핵심은 Build-Measure-Learn 순환을 통해 고객 피드백을 기반으로 신속하게 가설을 검증하고, 필요시 피봇하는 것.
그렇게 영감과 직감으로만 살아오던 제가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하던 디자인이 아닌 사회과학 분야로요.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기술창업학과입니다.
그동안 영감과 직감에만 의존하던 저의 창업 방법을 남들에게 알려주려면 뭔가 설득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내가 해봤으니까 그래!" "일단 해보니까 되던데?"
이런 개인의 성공담이 아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로 번역할 능력이 필요했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박사 1년 차.
저는 벽을 마주했습니다.
학사도, 석사도 아닌 수준 높은 지식을 요구하는 박사과정.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통계연구방법론, 영어로 된 논문들, 처음 들어보는 이론들.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앉아서 읽고 공부해도 따라가기 힘든 분량이었습니다. 회사 일도 하고, 때로는 강의나 멘토링도 병행하면서 이 많은 양을 공부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 AI가 보급된 이후에 박사에 들어와서 다행이구나."
AI에 아무리 어려운 영어 논문도 PDF 파일로 업로드하고 "번역하고 요점만 정리해줘!" 하면 단 10초 만에 핵심만 추린 내용이 주르륵 나왔으니까요.
처음에는 번역하고 요약하는 용도로만 거의 사용했던 것 같아요. 이것만으로도 최고의 만족감이었죠.
문제는 제가 발표를 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맡은 주제를 번역해서 요약하고, 제 생각을 더해 학우들 앞에서 발표해야 했어요. 발표를 한다는 건 제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거였습니다. 발등에 불이 붙었죠.
기존에 AI로 번역하고 요약해서 제출했던 레포트는 사실 100% 이해했다고 볼 수 없었거든요. 그냥 '이렇구나, 이런 게 있구나' 정도였죠.
그때부터 저는 AI에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이 내용을 번역해봐." "요약해줘." "그러니까 이 부분은 이렇게 된다는 거지?" "아니,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 이론과 유사한 주장을 한 사람은 누구야?" "그 흐름이 여기서 이렇게 이어지는 게 맞아?" "이 이론을 주장하기 이전과 이후는 뭐가 달라졌지?" "내가 한번 이해한 대로 말해볼 테니까 틀린 게 있는지 검토해줘." "그 부분은 이해가 안 되는데 쉽게 설명해줘봐." "이해할 수 있게 예시도 들어줘."
이건 제가 운전하면서 AI와 대화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준비한 자료를 AI에게 업로드하고, 음성으로 이렇게 대화하면서 운전을 했죠.
그 경험은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마치 내 옆에 과외 선생님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AI와 대화하고 궁금한 내용들을 질문하기 시작했더니, AI는 마치 백과사전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가져오며 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AI는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답을 내놓는구나. 결국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린 거구나.
이 깨달음은 프롬프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AI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프롬프트를 제대로 써야 한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직업이 뜬다,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좋은 프롬프트를 찾기 위해 돈을 주고 강의를 듣기도 했고, 책도 샀죠. 그리고 거기 적힌 대로 그대로 복붙해서 AI에게 요청했습니다. 프롬프트는 AI를 길들이는 마법의 주문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냥 달달달 외웠죠.
그럼 프롬프트가 좋지 않으면 A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걸까?
저는 거기서 해답을 찾았습니다.
학교에서나 특강을 들을 때 선생님이나 연사분들이 꼭 마지막에는 Q&A 시간을 갖습니다.
"자, 이제부터는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그러면 대부분 강의장이 조용해지죠. 이때 질문이 하나도 안 나오면 모두가 민망한 시간이 됩니다. 그럴 때 다행히도 꼭 질문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요. 저는 그러면 마음을 쓸어내리며 '아, 다행이다!'를 외칩니다.
그러면 질문하는 사람과 질문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네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수업 내용에 대한 경험 그와 연관된 지식 '왜 저기서 저런 말을 하지?' 하는 의심 '저 부분은 더 알아보고 싶은데?' 하는 호기심
이 네 가지가 있어야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AI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AI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AI는 답만 합니다. 질문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질문의 깊이는 경험, 지식, 의심, 호기심에서 나옵니다.
저는 박사 2년 차에 학술지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최종 게재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어요. 두근두근..) 교수님도 선배들도 2년 차에 논문을 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에게 AI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싶어요. (물론 AI가 논문을 써줬다는 건 아닙니다.) AI는 이번에도 저의 든든한 논문 과외 선생님이 되어 주었죠.
AI가 등장해서 저는 너무 좋습니다.
AI에게 좋은 질문을 하려면 결국 제가 먼저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오늘도 공부합니다.
AI에게 대체되지 않기 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