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까지 불사를 사랑

설화 '광청아기'

by 장아연
광청아기: 정인의 조상신이 된 여인


제주도에 사는 송동지는 섣달그믐에 사또의 명으로 떠났다. 진상을 바쳐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광양딸 광청고을 허정승 댁에 머물게 되었다. 저녁상을 받고 잠을 자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송동지는 산책하다가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다. 허정승의 딸인 광청아기가 창밖을 보았다. 두 사람은 눈이 딱 마주쳤다.


송동지는 돌아가려고 했지만, 광청아기에게 붙잡혔다. 광청아기는 송동지에게 술을 권유한다. 야심한 시각,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점점 취해갔다. 광청아기가 서글프게 말했다.


"나는 장차 아버지인 허정승의 뜻대로 혼인해야 할 몸입니다. 혼인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겪어보고 싶으니까 나랑 손님이 옷을 바꿔 입고 색시놀음을 하는 건 어떠십니까?"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옷을 바꿔 입고 신혼부부를 흉내 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을 때, 송동지는 어젯밤 일이 꿈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이 허정승 댁을 나와 고향에 돌아가도 이 일이 아른거렸다.


몇 개월 후, 다시 광청고을의 허정승 댁을 찾은 송동지는 광청아기와 재회했다. 광청아기는 송동지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 당시엔 육지 여인은 제주도로 갈 수 없기에 송동지는 얼른 도망쳤다. 이 사실을 허정승이 알면 이미 죽은 목숨인 광청아기는 송동지를 쫓아갔다.


수소문 끝에 송동지가 숨어든 배를 찾은 광청아기는 뱃사공에게 발판을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뱃사공은 발판을 놓는 척 광청아기를 물에 빠뜨렸다. 그렇게 광청아기는 물에 빠져 죽었다.


훗날 제주도로 돌아온 송동지는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잘 살았다. 어느 날, 물고기를 낚고 돌아오는 길에 송동지의 막내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상한 기운을 보였다. 송동지는 이상한 느낌에 얼른 막내딸에게 가서 물었다.


"아가. 왜 그러느냐?"

"나는 광청고을 허정승 댁의 광청아기다. 원한이 깊어서 이승을 떠날 수 없구나."


그제야 송동지의 막내딸에 죽은 광청아기의 혼령이 의탁했음을 깨달았다. 송동지는 광청아기의 혼을 풀어주기 위해서 무당을 수소문했다. 여러 번 혼을 풀어주고, 아들 하나를 광청아기의 양자로 삼았다. 양자가 된 아들은 부자가 되었다.


송동지네 집안은 번영했으며 그들은 광청아기를 조상신으로 모셨다.




설화 속 로맨스는 항상 비극으로 끝났다. 몇몇 설화는 비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행복한 결말로 끝나긴 한다. 하지만 대체로 비극적인 결말이 많았다. 왜 설화의 로맨스는 이런 식일까? 그 당시 사람들도 소위 말하는 '망한 사랑'을 좋아하는 걸까?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이 있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제일 재밌는 건 망한 사랑이로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내가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알아주는 망한 사랑 콜렉터였다. 평범한 사랑은 내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심장이 박박 찢길 정도로 애절한 사랑이 좋았다. 전생과 현생이 지독하게 엮이거나 몇 백 년을 기다리는 로맨스면 흡족했다.


사실 선호하지 않는 장르 중 하나가 로맨스다. 나는 애당초 사랑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남들은 대체 어떻게 쉽게 사랑하고 이별하는지. 내게 사랑은 하나의 운명과도 같았다. 운명이 부여하지 않으면 나는 누군가를 쉽게 사랑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을 좋아한 적도 손에 꼽았다. 아, 물론 나도 연예인 자체를 좋아한 경험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부류는 주로 배우였다. 가끔 내가 배우 자체를 좋아하는지, 그 배우가 맡았던 특정 인물을 좋아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9할은 사람이 아닌 캐릭터를 좋아하는 듯했다.


이 설화 속 송동지는 지독한 회피형이고 광청아기는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심지어 광청아기는 송동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 설화를 보면서 느낀 건 구조 내용이 현대 로맨스 소설과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문학도이기에, 구조를 파악하는 게 익숙했다. 한 번만 읽어도 머릿속에 개요가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설화 속 내용이 변형되고 전승되어서 현대에도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야기라는 건 한정적이다. 사랑 같은 보편화된 감정은 더 그렇다. 설화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그 말은 즉, 이야기의 기초 뼈대라는 소리다. 글을 배울 때마다 선생님들은 시놉시스의 중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뼈대가 두텁지 않으면 아무리 잘 쓴 글이어도 망가지기 쉽다는 견해였다.


어쩌다 보니까 로맨스를 쓰게 되었다. 나는 딱히 사랑에 열정적인 편도, 무언가를 사랑하고자 파헤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하고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내가 설화 '광청아기'에서 꽂힌 건 두 사람의 사랑이 아닌, 평범한 광청아기가 죽음으로써 조상신이 된 점이었다.


"네가 무슨 로맨스를 써?"


내 소식에 주변 사람들이 더욱 놀랐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던데 사랑에 각박한 사람이 로맨스 소설을 쓰게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막상 쓰고 보니 재밌었다. 망한 사랑이 취향이지만 내 인물들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왕 로맨스를 선택했으니까 미친 듯이 작품을 읽었다. 손에 닿는 대로 아무거나 찾아 읽거나, 다양한 로맨스 드라마를 시청했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 하나.


'나 생각보다 로맨스 좋아했네?'


그렇다. 나는 사랑에 각박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연애가 싫은 사람이었다. 밥-영화-카페를 반복하는 것보다 스펙터클하고 불안정한 사랑이 좋았던 거다. 하지만 현실과 소설은 당연하게도 달라서 후자의 사람을 만난다면 내 삶도 함께 무너졌다.


무엇보다 나는 꽤 독립적인 사람이어서 누군가 내 루틴을 깨는 걸 원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건 내게 꽤 힘들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사랑을 꿈꿨다. 한 번의 선택으로 운명이 바뀔 만한 그런 사랑.


성애적인 사랑만 사랑이냐? 당연히 아니다. 난 따지고 보면 인류 자체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 모두와 친구가 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거다. 세상에서 제일 친구가 많은 사람 1위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프로그램 인터뷰를 나갔을 거다. 그저 스쳐가는, 스쳐갈 인연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 우리의 연은 이만 끝이지만 언젠가 맞닿으면 다시 만나길 희망한다.


나는 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조상신이 되어서 송동지네 집안에 복을 내려준 광청아기처럼, 나를 아는 모든 이의 성공과 행복을 바랐다. 멀리 떠난 그들과 성장해서 만나면 더 좋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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