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는 비행청소년이 되었다

설화 '바리데기'

by 장아연
바리데기: 버려진 아이


때는 수백만 년 전, 이승의 왕과 왕비가 살았다. 그들은 아들을 낳기 원했으나, 줄지어 딸이 나왔다. 여섯 명의 딸을 가진 왕은 마지막 아이에게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일곱 번째 아이도 딸이었고 분노한 왕은 그 아이에게 '바리데기'란 이름을 주곤 물가에 던져버렸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살아서 노부부의 손에 들어갔다.


노부부가 아이를 정성껏 기르기를 몇 년, 성년이 된 바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 어느 날, 왕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왕을 치료하기 위해선 저승 땅에서 나는 약수를 구해와야 했으나, 여섯 딸 중 누구도 가지 않았다. 결국 왕은 자신이 버린 바리데기를 찾아 부탁했다.


바리데기는 험난한 저승 땅을 헤쳐 무장승이 관장하는 약수터에 도착했다. 무장승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였으나, 그는 쉽게 약수를 내어주지 않았다. 자신과 살림을 차리고 아이 셋을 낳아주길 원하는 무장승의 요구를 들어준 바리데기는 무려 삼백 년이 지난 후에야 약수를 얻었다.


다시 왕을 찾았으나, 이미 왕은 세상을 떠났고 바리는 약수를 입에 넣어주며 자신이 바리라고 고백했다. 이에 기적처럼 눈을 뜬 왕은 바리데기를 버린 자신을 뉘우치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감복한 왕은 바리데기에게 나라와 부귀명예를 줄 걸 약조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저승의 무장승과 혼인한 몸, 저승으로 가서 살겠습니다."


바리데기는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저승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바리데기의 가족인 무장승과 아이들이 있었기에. 그 후, 바리데기는 저승신이 되어 망자들을 인도하게 되었다. 바리데기를 애지중지 키운 노부부 또한 망자에게 길삯을 받는 안내자가 되었다.



설화 '바리데기'는 전래동화 도서로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린이일 시절에 읽었다. 예나, 지금이나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 뭘까? 언젠가 급박할 땐 버린 자식이라도 이용하라? 비록 나를 버린 부모라도 천륜은 끊을 수 없으니 용서하고 받아들이라? 극단적이지만 어떤 쪽이든 2025년 현대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 설화가 구전할 무렵엔 아주 오래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조선시대엔 효를 중시하는 유교 사상이 있었다. 감히 자식이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에 이 설화는 신선했을 것이다.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왕을 위해 저승까지 갔다 온 인물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했던 바리데기가 사실은 '버려진 공주'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곧장 저승까지 다녀왔다.


이건 대단한 실행력이다. 몇백 년이란 세월을 지나 약수를 떠 온 바리데기는 세속적인 모든 걸 마다했다. 부귀와 명예, 왕의 후계자 등등. 대신 바리데기는 무(無)로 돌아갈 모든 망자를 인도하는 저승신이 되었다. 이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고통인 윤회를 끊고 모든 업보를 청산한 셈이었다. 버려진 아이에 그치지 않고 바리데기는 본인의 운명을 직접 선택했다. 더는 이승의 버려진 공주가 아닌 저승신이 된 것도 바리데기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걸 보는 우리는 2025년에 살고 있다.


현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특히 작은 사회라고 불리는 학교에선 별의별 일들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과거 개근은 성실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가정학습을 낼 수 있는 빈도수가 늘어났으며 오히려 그걸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분위기였다.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입시에 몰두하는 학생도 적잖이 늘었다. 시대는 변하지만 설화는 그대로였다.


만일 바리데기가 2025년 학교에 갔다면 어떨까? 아버지를 구했을까? 과거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는 게 미덕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아버지인 왕은 바리데기의 유년기에 트라우마를 남긴 셈이었다. 예상하건대, 바리데기가 현대에 살았다면 '착한 아이 증후군' 내지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을 거다.


처음 바리데기를 읽은 건 일곱 살 무렵이었다. 바리데기는 용감하게 저승을 건너서 아버지를 구할 약수를 떠 왔다. 그 당시 나는 저승이 가까운 곳인 줄 알아 곧장 짐을 쌌다. 살릴 사람은 없어도 약수를 구해오면 언젠가는 쓸 날이 필요할 줄 알았다. 저승으로 가는 길이나 방법은 전혀 모르지만 모험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그때 여행을 떠났다면 좀 나았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가족의 수는 점차 줄어갔다. 몇 년 주기로 병을 걸린 가족은 운명하였으며 남은 사람이 빈소를 지켰다. 우리 가족은 하필 천주교라서 매번 종아리가 쥐가 나도록 미사를 보았다. 그건 내 몫이었는데 이유는 딱히 없었다.


난 신실한 천주교인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불교의 원리에만 관심을 두는 무교였다. 모든 종교의 끝은 죽음이다. 태어난 흙으로 잘 돌아가는 것. 인간에게 저승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바리데기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가끔 나는 바리데기의 마음을 분해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싶었다.


나이가 좀 찼을 때, 바리데기의 심정을 떠올렸다. 내 머릿속엔 설화고등학교 2학년 4반의 김바리가 살았다. 김바리는 교칙을 줄곧 무시하는 편이었고 늘 혼자였다. 교복 대신 체육복 바지를 입으면서 매번 일찍 등교했다. 이따금 티 나지 않게 염색하곤 모르쇠 했다. 교사들은 교칙을 위반한 김바리를 비행 청소년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행 청소년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인 정의는 '미성년자로서 지켜야 할 규칙을 위반하고 범죄, 위법 행동 등을 행하는 만 13세 이상 19세 미만의 청소년'이었다. 범죄를 저지르면 범죄자 아닌가? 왜 굳이 '비행'이란 있어 보이는 단어를 쓸까.


2학년 4반 김바리는 남들과 조금 다를 뿐, 위법 행위를 저지르진 않았다. 교사가 일컫는 비행 청소년의 의미는 아마 '교칙 안 지키는 날라리' 정도로 해석될 것이다. 김바리는 행보가 독특했다. 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 또 어버이날은 기막히게 챙겼다. 우연히 꽃집에서 김바리가 카네이션을 고르는 걸 목격했다. 내가 물었다.


"넌 가족이 밉지 않아?"


카네이션을 계산하던 김바리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렇다고 같이 미워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잖아."


미움이나 원한을 이기는 건 사랑. 김바리는 그걸 내게 알려주었다. 바리데기가 마냥 왕의 인정이나 사랑을 바랐다면 곧장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 평안하게 가족의 품에서 살다가 평범한 인간으로 생을 마감했을 거다. 하지만 바리데기는 그러지 않았다.


자비, 그리고 사랑.


그 모든 게 바리데기의 운명을 바꾸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났다. 세속적인 욕망이나 온갖 근심과 걱정. 죽음 이후엔 모든 게 사그라졌다. 바리데기가 저승신이 될 수 있던 건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그걸 실현한데 있었다. 가족을 향한 모든 미움과 증오를 통달하여 사랑을 덮은 자. 그건 신이 될 재목이었다.


어디선가 살고 있을 2학년 4반 김바리를 떠올렸다. 이젠 학년과 반에 욱여넣지 못할 정도로 훌쩍 컸을 김바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오늘의 나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공책에 무언가를 끼적였다. 나를 알아가기 위한 첫 번째 여정, 특히 내가 가진 트라우마는 무엇인지 직면하고 싶었다.


<사랑은 힘이 세다. 무엇이든 이길 수 있는 무적의 존재다.>


그러니 마음속에 사랑을 품어야겠다. 이제 막 첫 번째 장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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