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집 값이 제법 비싼 이 동네에 자리를 잡고 강남 주민이 된 것은 내 능력에 대해 한없이 큰 행운이었다. 어디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바로 급여 수준을 알 수 있는 남편의 직업과 내가 하는 일을 아는 동네 엄마들은 하나같이 '성공하셨네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
아직 이 동네 재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던 때, 전세나 혹은 반전세를 사는 아들 친구네 집이 사실 나는 더 능력이 있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빠들은 대기업에서 번듯한 직종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집에서 내는 월세는 우리 집의 형편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금액이었다.
아무튼 그 엄마들이 '성공했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는 줄 잘 알고 있다. '어떻게?'라는 의문이 가장 많이 묻어나는 그 말에 나는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귀찮지만 남편은 쥐꼬리 같은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종잣돈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회사 주택 조합에 가입하여 서울 근교의 넓은 평수 아파트를 생애 최초로 갖게 되었다. 그 집은 두 배 정도 올라서 이윤을 남겼고 마침 지금의 아파트가 경매로 나오면서 우리 식구는 분수에 맞지 않게(?) 강남 주민이 될 수 있었다. 빚 1억과 함께.
주말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는데 부부사이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각각 골프백을 (그 가방이 무슨 정식 명칭이 있고 종류가 많은 것으로 들은 적이 있지만 난 잘 모르겠다)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다. 나와 남편은 그 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와서 내가 던진 한마디는,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 집이 소득이 가장 낮겠구먼!"
이런 현상(?)은 나의 아이들도 익히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내가 어릴 때 엄마아빠가 큰 맘을 먹으시고 뭔가 좋은 거, 비싼 것을 사주실 때는 '조심해, 잃어버리지 않게.'라든지, '다른 애들이 훔쳐가지 않게 잘 간수해.'라고 하시면 나는 정말 애지중지 잘 다루었다. 그러다가 진짜로 도둑을 맞는 일도 있었다.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주신 공주구두가 감쪽같이 사라져서 보트 같은 선생님 슬리퍼를 질질 끌고 울면서 집에 돌아온 기억은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개시를 한날 도둑을 맞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아이들은 달랐다. 큰 녀석은 뭔가 갖고 싶은 것을 진지하게 설명하며 나를 설득하곤 한다. 그것들은 아이가 몇 날 며칠을 조르고 나도 고민을 해야 하는 수준의 물건들이었다. 내가 마침내 아이에게 사주고, 내가 어릴 때 엄마아빠한테서 들었던 것처럼 '조심해, 잃어버리지 않게.'라고 말하면 아이는 시크하게 대답했다.
"우리 반 애들 이거 다 있어. 내가 제일 늦게 산 거야."
이십 대 초중반에 나는 당시에도 버스를 타고 강남, 서초 지역으로 직장을 다녔다. 아무것도 없고 별 볼일 없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애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런 건물 가질 거야. 꼭 강남에서 살 거야.' 아무런 답도 희망도 없을 것 같은 나는 그런 공상에 가까운 혼자만의 상상을 했었다. 그러다가 현실을 더 직시하게 되면서 그런 생각들은 차차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도 강남 강남 상상하면서 끌어당겼다고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건가? 하하하"
나는 유튜브의 자기 확신, 끌어당김 어쩌고 하는 채널의 영상을 보며 가만히 나의 이십 대 시절을 회상했다.
"계속 생각을 하고 끌어당겼어야 했는데 끌어당기다가 말았으니 지금 적은 평수에 살게 된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놈의 법칙인지 뭔지를 있는 대로 다 갔다 찍어 붙여본다.
남편이 어느 날 말했다. 자기 꿈은 옆 동네 주택단지에 주택하나 사서 거기에 4~5층짜리 빌라를 짓고 1층에는 상가로 세를 주고 맨 꼭대기 층엔 우리가 살고 나머지는 전세를 주던지 하는 것이라고.
강남을 끌어당기고 건물도 끌어당기고 공상에 가까운 상상은 나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능력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근데 저 사람이 나 대신 사력을 다해서 끌어당기고 있다.
'강하게 끌어당기면 내가 능력이 안 돼도 그 능력을 대신 발휘할 사람을 끌어당겨 주는 건가?'
나는 론다번의 시크릿을 다시 한번 뒤적거렸다.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