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좋아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13

by 쓰는수 이지수

B는 오늘따라 대답을 척척한다. 내 물음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하긴 하지만 오늘은 정확한 답을 말한다.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계속 질문을 하며 아이의 흥을 돋우려 노력한다. 아이는 2년이 넘도록 알파벳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고학년이 되었고 덩치만 조금씩 자랐다. 아니 덩치는 원래 컸었다. 저 듬직한 아이는 아마 키도 나보다 클 것이다. 지난주에도 헷갈리는 알파벳을 틀리게 답하여 '알파벳 외우세요'하고 웃으며 상냥하게 말해 주었다. 물론 언성을 높이지는 않는다. 화면상단의 빨간 점은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한 박자씩 대답이 늦더니 마침내 '어?'하고 옆쪽을 향해 되묻는다. 그제야 나는 그 아이보다 더 똘똘하다는 아이의 동생 녀석을 떠올렸다. 동생이 가르쳐줘도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 말하는 B는 정말 착한 형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짓궂은 장난을 쳤다. 학습 내용 중에 한 문장을 우리말로 일러주며 "이건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지도 한번 물어봐." 하고 말했다. 아이는 나를 속이려던 깜찍한 행동을 들켰다는 무안함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C는 오늘도 나를 개무시하며 화면 앞에 앉아만 있다. 조금 부족한 아이였으면 그러려니 하고 짧은 시간 대충 때우고 화면에서 사라지면 됐지만 저 아이는 모자란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똘똘하고 밀린 학습 없이 규칙을 지키는 아이 같다. 내 시간에도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내가 '쓰세요'하면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더니 선심 쓰듯 빈칸을 능숙하게 채우고 다시 제 할 일을 한다. 화면 안으로 주먹을 쑥 내밀어 저 자그마한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어 진다. 30여 년 전 막내 동생 학습지 선생님의 감정이 내게 덧씌워지는 기분이다.






나는 갑작스럽게 마이크의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그리고 목청 높여 소리쳤다.

"수업에 들어왔으면 딴짓하지 말고 들으세요. 딴 거 하지 말고!"

아이는 갑작스러운 소음에 흠칫 놀라며 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나 때문에 난 화를 참는다는 듯 어깨를 크게 들썩거리며 눈을 깔고 있다. 나를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학부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수업에 들어왔으면 제발 딴짓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아이에게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아이의 엄마는 답이 없다. 그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아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다음 메시지에는 이렇게 쓰고 싶었다. '어머니, 우리 엄마도 저 어릴 적에 집에 온 선생님을 학습지 선생님이라고 개무시했었거든요. 근데 제가 지금 이러고 있네요. 호호호'






어느 날 B가 수업 시간 변경을 하며 내 리스트에서 빠졌다. 난 그 아이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클릭하여 '배정 가능'을 설정했다. 그 자리에 다른 아이가 채워졌다. 아주 개구쟁이였다. 시간을 바꾸면서 교사도 함께 변경된 케이스였다. 처음부터 활달한 모습을 보이던 아이는 끝나는 음악과 함께 본색을 드러냈다. 손가락을 제 양 볼에 갖다 대고 나를 바라보며 메롱 메롱을 신나게 해댄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타이밍을 잘도 잡는다. 기분 같아서는 괴상한 표정까지 지으며 똑같이 메롱 메롱을 해주고 싶었지만 화면에서 나갈 때까지 빨간 점은 에누리 없이 나의 모습을 영상에 담고 있다. 꼭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나이에 어린아이와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 저 엄마보다도 나이 많은 화면 속 아줌마가 메롱메롱하는 모습은 아이도 아마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제기랄.





나는 알파벳을 떼라고 매번 면박을 주었던 B가 생각났다. 알파벳을 몰라도, 좀 느리게 가더라도 아이는 참 순하고 착했다. 똘똘하다는 동생이 수업 중인 형 뒤에서 장난을 쳐도 아이는 그저 착한 곰처럼 웃기만 했다.

'걔는 예의가 바르고 착했는데. 동생이 옆에서 가르쳐준 날도 그냥 모른척해줄걸.'

그럼 그 착하고 순한 아이는 나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서 여전히 내 수수료를 올려주고 있을 텐데. 알파벳을 못 뗀 게 뭐 별거라고.






그 메롱 메롱의 남은 수업 일수를 확인해 본다. 앞으로도 계속 메롱 메롱만 하면 다행이지, 그 장난은 더욱 진화할 것이다. 1년도 넘게 남은 수업 일수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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