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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Mar 04. 2024

질문, 43년 전의 기억

세월이 흘렀다


"어린 녀석이 어찌나 빠르던지. 울면서 앞으로 막 걸어가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최씨 아저씨. 어렸을 적 아버지 친구분으로 내가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무슨 얘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최씨 아저씨"라는 표현을 썼다. 작은 공장 하나를 운영했는데, 당시에는 제법 돈을 많이 벌었다. 그 시절에 벌써 자가용을 끌고 우리 가족을 태워 바다며 들이며 놀러 다녔을 정도니까. 


세월이 흘렀다. 일전에 우연히 최씨 아저씨가 합천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뵙고 싶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어렸을 적 내 부모에게 잘해준 친구분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또, 이제는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두 분 모시고 합천으로 향했다. 집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 이토록 지척에 두고 긴 세월을 그냥 흘려보낸 것이다. 최씨 아저씨 내외는 차가 들어서는 길목에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머리는 벗겨지고 턱수염은 도사처럼 기른 노인.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산과 들로 둘러싸인 논두렁 옆 좁은 흙길 위에서, 차에서 내린 아버지와 어머니는 최씨 아저씨 내외와 부둥켜 안고 울었다. 아이고 이 사람아! 살아 있으니 이렇게 다시 보네! 그 동안 잘 살았는가? 아이고 이 사람아!


사방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닭장에는 수십 마리 닭이 퍼덕거렸다. 임시로 지어 놓은 움막 같은 곳에 들어서니, 비로소 사람 사는 것 같은 살림살이가 옹기종기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여든 넘은 나이. 최씨 아저씨의 삶은 초라했다. 


"소송이 하나 걸렸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땅을 본인 명의로 해야 한다 해서 문중 공동 명의로 되어 있던 내 땅을 내 명의로 바꿨지. 그런데, 나쁜 마음을 품은 인간들이 땅의 소유권을 주장한 게지. 처음엔 당연히 내 땅이니까 별 문제 없이 재판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30년이야. 소송 하나 매달려 전 재산 다 날리고, 이제야 내가 이긴 걸로 최종 판결이 났네. 이겨서 다행이긴 한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내 인생은 다 어데로 사라지고 지금 여기 땅덩어리 하나 달랑 남은 거야."


지난 세월 어렵고 힘든 시간을 겪었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동안, 어머니는 몇 번이나 눈물을 훔치셨다. 아버지는 최씨 아저씨의 손을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친구를 다시 보게 되었다며, 다시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좋아하셨다. 그제야 나를 돌아보며 물으신 거다.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 거냐?"


"네, 아저씨. 함께 놀러가던 날, 어머니가 저 먹으라고 계란을 삶았는데요. 아저씨께서 그 계란을 다 드신 거예요. 최씨 아저씨가 내 계란 빼앗아 먹었다고 울며 불면 난리를 피웠던 겁니다."


친구인 아버지를 그리워할 때마다 한 번씩 어린 나를 떠올렸다고 하셨다.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었지 싶은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고.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고. 계란 먹은 걸 이제야 갚을 수 있게 되었다며, 해인사 입구 식당으로 가자 하셨다. 


30반첩에 송이국.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비우고 식당 아줌마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아저씨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은대야. 내 이제 계란값 다 갚은 기다."


43년 걸렸다. 아저씨는 너무 늦게 찾아 뵈었다. 아저씨는 30년 세월 동안 소송 치르느라 젊음을 통째로 잃으셨고, 나는 그 사이 전과자 파산자가 되어 삶을 놓으려 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세월 속으로 사라진 채, 주름 가득한 힘 없는 노인이 되어버린 아저씨. 최씨 아저씨 내외분에게 큰절을 올렸다. 


"전화번호 저장해뒀으니 자주 전화해라. 은대 니가 전화했는데 내가 안 받으면 죽은 줄 알거라."


가을에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면, 사진도 찍고 감도 따러 오겠다고. 저는 무슨 말이든 한 번 하면 꼭 지킨다고. 아저씨는 다시 온다는 말에 아이처럼 좋아하면서도, 가을이면 너무 늦다는 투정도 빼놓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길에. 노인 네 분은 다시 서로를 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리셨다. "세월이... 세월이 우째 이리 야속하노..."


고속도로에 차량 불빛이 가득해졌다. 주변이 어두워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고맙다. 덕분에 친구 다시 만났다.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두 분 모시고 다녀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데, 나는 자꾸만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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