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날
자동차 사고 난 적 많다. 내가 피해자인 적도 많았고, 내가 가해자인 적도 있었다. 다행히 목숨이 오갈만큼 크고 치명적인 사고는 없었다. 사고 처리 과정에서 고성이나 욕설이 오간 적도 없었다. 나는, 내가 피해자일 때는 모조리 "됐어요, 괜찮아요"라며 끝냈다. 사고에 대해 두 번 언급한 적도 없다.
다들 바쁘고 힘들게 살아간다. 내 차를 뒤에서 박거나 상대가 신호를 위반하여 부딪힌 경우, 나는 그들에게 아무 문제 없으니 그냥 가라고 했었다. 굳이 보험회사 부르고 일 크게 만들어서 힘든 사람들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허리에 금이 간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도 되었다.
그런데, 내가 사고를 낸 경우에는 달랐다. 그들은 한결같이 끝까지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보험회사에 말했다. 그들이 달라는 대로,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을 해주라고.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대단한 사고라도 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신호등 대기중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바람에 살짝 콩 하고 박은 게 전부다. 총 세 번. 그럴 때마다 상대 운전자는 목을 부여잡고 허리를 비틀고 다리를 절었다.
얼마 전에도 접촉사고가 있었다. 신호 대기중이었다. 경사진 곳이었는데,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해서 차가 앞으로 확 쏠릴 것 같진 않았다. 잠시 발에 힘을 빼는 탓에 앞에 정차한 차를 박고 말았다. 얼른 내려 운전자 상태부터 챙겼다. 번호판 손상된 것 말고는 다른 이상이 없었다. 출동한 보험회사 직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진도 찍고, 상세한 보상 설명도 함께 해주고는 현장을 떠났다.
20일이 지난 오늘, 상대 운전자는 87만원이라는 금액을 청구해왔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당시 현장 상황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금액이 터무니없음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제법 사는 사람 같았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억지와 못된 심보가 나오는 것일까.
나는 사고를 당했을 때 보상을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사고를 낼 때마다 모든 죗값과 보상을 최대한으로 치뤄야 했다. 당하기만 하고 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억울하다. 분하다. 속이 상한다.
사업 실패로 10억이 훌쩍 넘는 돈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법정에 선 금액은 1억 조금 넘었다. 용서하고 기다려주겠다는 사람이 많았던 덕분이다. 나는 1억 조금 넘는 채무로 인하여 법정 구속되었다. 전과자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해 억울하다 생각한 적 없다.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죗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반성하고 뉘우쳤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법을 피해간다. 수십억 수백억 사고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들을 보면서 나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도소에 간 것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일까. 씁쓸해졌다.
총선이다. 국민을 대표하여 나랏일하는 일꾼 뽑는 선거다. 한 사람 한 사람 지켜본다. 보면 볼수록 화가 치솟는다. 저들은 어쩜 저리 큰 죄를 짓고도 당당할 수 있는가. 저들에 비하면 나는 어린 아이 잘못 정도인데, 왜 나는 그토록 모진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가.
신념을 바꿔야 하는 것인가. 용서하고 배려했더니 돌아오는 건 진상뿐이다. 마음 내는 만큼 인생 좋아지고, 베푸는 만큼 돌려받는다는 책 속 이야기들은 죄다 거짓이었던가. 착한 사람 복 받고 나쁜 사람 벌 받는다는 얘기도 권력 앞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인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잘되는 세상이길 바랐다. 나는 그렇다치고, 혹시 내가 말과 글로 전했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나처럼 '당하기만' 하면서 살게 된다면, 나는 또 그 미안함과 죗값을 어찌 치뤄야 한단 말인가.
약삭빠르고 못됐고 기회다 싶으면 아주 뽕을 뽑으려는 작자들이 잘사는 세상. 현실이 정말로 이러하다면, 나도 제대로 못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몸이 아파도 고생이고 마음 아파도 힘이 든다. 그런데, 신념이 흔들리는 고통과는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보험회사 담당 센터장이란 사람한테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에 힘이 빠졌다.
"세상이 원래 그렇잖아요."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