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감도는 시간
어머니는 여든 넘었습니다. 며칠 전, 종일 부엌에 서서 장조림과 고추장볶이를 만드셨습니다. 아내가 삼시세끼 챙기고 반찬 다 만들지만, 어머니도 종종 음식을 장만하시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장조림과 고추장볶이를 다 만들어 식탁에 놓으면서 어머니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요즘 반찬이 너무 부실하다. 뭘 좀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니겠니."
이 한 마디가 아내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1년 365일 하루 세 끼 차리는 여자 잘 없지요. 아내도 나름 한다고 하는데,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반찬투정'이 어머니 입에서 나오니까 참기가 힘들었나 봅니다. 갱년기라 얼굴이 시뻘겋고 몸도 좋지 않고 손발도 차갑고 감정 변화가 심한 상태에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내. 한바탕 전쟁을 치뤘습니다. 고성이 오가고, 두 사람 모두 사흘째 밥도 안 먹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아버지 표정도 계속 어둡고, 아들도 눈치 보느라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섯 식구 중에서 저만 괜찮습니다.
제가 괜찮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두 달째 극심한 통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 잠시도 견디기 힘들 지경인데 다른 식구 다투는 데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싸우든지 말든지 일단 내 몸 낫고 보자 싶어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 일주일 또는 길어야 열흘 지나면 두 사람 다시 하하 호호 잘 지낼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고부 갈등 심했습니다. 제가 사업 실패하고 감옥에까지 갔으니 저 없는 동안 두 사람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웠겠습니까.
집안 망해서 함께 살게 된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 사이가 좋을 리 없겠지요. 별일이 다 있었습니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겠구나 싶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엄마와 딸처럼 '뻔뻔스러울 정도'로 잘 지내곤 했지요.
열흘만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서로 웃으며 밥 먹을 사람들이 왜 저리 죽일듯 감정 싸움을 하고 있는지 한심하고 답답할 노릇입니다.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두 사람이 싸웠다 하면 무조건 둘 모두에게 일부 책임이 있게 마련이지요.
저는 인생 고난 겪으면서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절망과 좌절로 술에 취해 흥청거리기도 했고요. 감옥에서 세월 날려먹기도 했습니다. 정신 차리고 난 후에는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서 심장을 긁으며 후회했지요.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하루 4시간 수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것도 전부 과거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겠다는 심정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잘 알면서도 늘 잊고 살아가곤 하지요.
시간의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제가 과거에 겪은 상처와 아픔은 일일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별다른 치유의 과정 없이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까 고통의 정도가 줄어들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겁니다. 시간이 약이란 사실을요.
몸이든 마음이든 힘들고 어렵게 보내는 시간은 아깝습니다. 행복하게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감정 낭비하면서 세월 보내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픔의 정도가 많이 줄어들고 또 잊혀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시간은 참으로 아까운 삶의 요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통해 많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고부간 갈등으로 다투는 때가 있지만, 그래서 앙금을 갖고 밥도 안 먹고 말도 하지 않은 채 보내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날이 지나면 또 풀릴 거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저는 그저 두 사람 비위 맞춰 가며 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업 실패하고 감옥에도 가 보았고, 파산도 해 봤으며, 알코올 중독에도 걸려 보았고, 암 진단도 받았습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별 헤괴한 질병으로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지옥 같은 통증을 경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마음 아픈 것도 진절머리 날 정도고 겪어 보았고, 몸 아픈 것도 아주 덧정 없을 정도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사람이 살면서 일상에서 겪는 온갖 다양한 문제와 고민들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아내가 다투는 것이 지구를 구하는 일도 아니고 인류를 살리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의 인생에 무엇을 좌우하는 엄청난 시비도 아니지요. 당장은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하고, 또 자신이 당당하다는 생각만 들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예외없이 내가 그때 왜 그랬나 후회를 하게 마련입니다.
마음에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했을 때 자살 시도만 스무 번 가까이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60일 전부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진짜 이대로 삶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거든요. 그런데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또 그때 했던 생각이 참 철없었구나 싶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요. 아무리 기쁘고 좋아도 시간 지나면 시들해집니다. 좋다고 방방 뛸 것도 아니고, 나쁘다고 미친 듯 화를 낼 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물론, 사람이 무슨 도 통한 성인처럼 기쁨과 분노에 초연하기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매 순간 한 걸음만 물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 삶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오늘도 집안에는 정적이 감돕니다. 두 사람 밥도 먹지 않습니다. 쌀도 남아돌고, 조용해서 글 쓰기 좋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