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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넘은 남자의 눈물

나를 이해하는 내가 필요했다

by 글장이


여덟 평짜리 작은 사무실. 화장실 출입문 바로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는 울었다. 그리움에 젖어 스스륵 눈물을 흘린 정도가 아니라, 아이처럼 짐승처럼 소리내어 울부짖었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이 고작 그 결과인가.


5월초부터 8월 하순까지. 무려 넉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온몸의 신경이 퉁퉁 부어오르고, 곳곳에 염증이 생겼고, 허리 디스크가 돌출되어 신경을 누르면서, 목과 어깨와 팔과 다리와 허리와 엉덩이가 전기로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누워도 아팠고 앉아도 아팠고 걸어도 아팠고 가만히 있어도 아팠다. 사무실 화장실 문 위쪽에 턱걸이용 봉을 설치했다. 두꺼운 밴드를 걸었다. 목을 매달아 죽을 심산이었다. 차마 죽지 못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던 거다.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평소 다니던 내과에서, 그러니까 신경외과도 아니고 정형외과도 아닌 내과에서, 다 포기한 상태로 형식적인 처방만 받아 집으로 왔다. 무심결에 약을 먹었는데, 점심과 저녁 두 번 삼켰는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통증이 확 줄었다.


의사를 다시 찾아가서 이게 무슨 약이냐고, 수십 군데 병원을 찾아도 낫지 않던 통증이 어떻게 이 약 두 번만에 이렇게 괜찮을 수 있냐고 따지듯 물었다. 환자마다 몸에 맞는 약이 있을 수 있다고, 내성이 생기거나 몸에 해로운 약 아니니까 고혈압이나 당뇨약 먹듯이 계속 복용하는 게 어떻게냐고, 의사는 말했다.


약 먹고 통증 사라지면, 조금씩 운동하고 스트레칭 해서 근육과 인대를 강화하는 걸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아직도 밤에는 좀 힘든 편이지만, 그래도 지난 넉 달간의 통증에 비하면 기적 같은 상태이다.


강의 리허설을 마친 후, 잠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휴식을 취한다. 문득 화장실 문이 눈에 들어온다. 턱걸이용 봉도 아직 그대로 달려 있다. 그 아래에, 넋 놓고 울었던 자리도 그대로다. 어찌 그리도 서글프게 통곡을 했을까. 몸이 좀 좋아지고 나니까 그때의 눈물이 어색하고 부끄럽게 여겨진다.


다른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아픔을, 사람들은 하나 정도씩 간직하게 마련이다. 너는 모르지만 나는 죽을 것 같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비통한, 그런 슬픔이나 아픔이 누구에게나 있는 거다.


지독한 아픔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조차 나의 아픔을 무슨 꾀병처럼 듣곤 했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고통과 비애는 자신을 더 서럽게 만드는 법이다.


아무도 내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해주지 못해서, 나는 매일 글을 썼다. 내가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을 평가하지 않고, 내가 하는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 들지 않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을 곧이곧대로 귀담아 들어주는 유일한 존재. 내겐 그것이 백지였다.


살다 보면 토할 것 같은 때가 있다. 참고 누르면 속에서 곯아 터진다. 무조건 밖으로 터트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싸움이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자서 끙끙 앓기만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하얀 종이는 어떤 약이나 친구보다 든든하고 힘이 되는 존재이다.


서럽고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적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런 게 인생이라면, 왜 나한테 희망이란 걸 주었냐고 누군가의 멱살을 잡듯이 글을 썼다. 글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이 다 옳다며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다. 덕분에 눈물이 멈췄다.


복잡하고 분통 터지는 감정들. 도저히 누군가에게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할 자신이 없는 그런 감정들. 단어 하나를 고르고 문장 하나를 숙고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감정을 실체화했다.


누구보다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고통과 시련을 타인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봐주는 내가 필요했다. 아픔에 미쳐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에고 말고, 한 걸음 물러나 나를 애틋하게 봐주는 내가 절실했던 거다.


누군가의 말보다 더 큰 위로는 나 자신의 이해였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삐딱한 자세로 앉아 글을 썼고, 하루 4시간이라는 극단의 수면 시간으로 살았으니, 몸이 망가질 만도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열심히 살아서 인생을 바꿔놓은 나 자신이 대견하고 기특하게 여겨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글을 쓴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 하더라도 우습게 여기거나 속물로 보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나의 이유는 항상 신성한 것이요, 더 없는 절실함이니까.


다만, 글을 쓰려는 모든 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도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평가 받기 위함도 아니다. 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짚어 보는 것이 먼저다. 그 과정에서 세상과 타인을 도울 수 있으니 의미와 가치도 느낄 수 있는 거다.


회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사업 현장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것보다는, 조금은 신성한 이유를 각자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래서 글을 쓴다는 나름의 고결함을 갖는 것이 고독한 글쓰기를 버티는 힘이 되기도 할 테니까.


쉰 넘은 남자가 대성통곡 할 수 있었다는 게 웃기면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아직은 감성이란 게 남아 있는 모양이다. 좋아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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