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장이 Oct 08. 2024

하늘, 나무, 그리고 전봇대

어울리지 않는 것들과 함께


병원 가는 날이다. 두 군데 들러야 한다. 하나는 평소에 먹는 약을 타는 병원이고, 다른 하나는 신경 검사하는 곳이다. 약 타는 병원은 내과다. 5월부터 8월까지 넉 달 동안 죽을 뻔했다. 신경과 척추가 원인이라는데, 수십 군데 병원 다녀도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았다. 피부약 타는 병원에서 별 기대 없이 처방 받은 진통제가 기적을 일으켰다. 


의사는 머리가 허옇고 착하게 생겼다. 2016년부터 다녔으니, 이 병원과의 인연도 8년이나 되었다. 간호사도 몇 바뀌었고, 병원도 옆 건물로 이동했다. 의사 입장에서는 내가 단골 손님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친절하다. 진심인지 가식인지 매번 내가 들를 때마다 혈압도 재고 당뇨 검사도 해가며 내 건강을 염려해준다. 


통증 때문에 잠시도 가만 있질 못하고 악을 쓰며 지냈는데, 이 병원에서 처방해 준 진통제 덕분에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나도 모르게 의사한테 저보다 오래 사세요 했다. 그래야 계속 약을 탈 수 있을 테니.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처방전만 들고 가면 어느 병원이든 비슷한 약을 탈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왕이면 인연 맺은 의사한테 처방 받는 것이 안심이 된다. 


병원 옆에 약국이 하나 붙어 있다. 처방전을 내밀면 한참 있다가 약사가 약을 준다. 줄줄이 이어붙은 약 봉지가 마치 무슨 암 환자가 먹는 약처럼 많고 복잡하다. 매일 그런 독한 약을 먹고 있으니 당장 통증은 완화될지 몰라도 속은 다 썩어가고 있을 터다. 


"내성이 생기거나 부작용 위험 있는 약은 아닙니다. 고혈압 당뇨 환자들도 평생 약 먹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마음 편할 겁니다."

약사는 약을 제조해주는 사람이니까,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니까, 매일 여러 알을 삼켜야 하는 환자에게 그나마 위로의 말을 하는 거겠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몸이 아픈 것은 서러운 일이다. 나는 아픈데,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 나는 당장 숨을 쉬기조차 힘든데, 의사와 약사는 태연하다. 나이 먹으면 다 그렇단다. 척추도, 심장도, 폐도, 관절도, 여기 저기 고장이 난다는 뜻이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병원 다니고 약 먹으면서 계속 늙어가야 한다. 생로병사는 서럽고 슬프다. 


신경외과에는 점심 먹은 뒤에 가면 된다. 오후 3시 예약이다. 집으로 가서 밥 먹고 사무실 가서 일 좀 하다가 병원 들르기로 했다. 큰 도로 옆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 날씨가 참 좋다. 바람도 좋고 기온도 좋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는데, 하늘과 나무와 전봇대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과 나무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봇대는 생뚱맞다. 멀쩡한 자연에 사람이 훼방을 놓은 듯한 느낌이다. 어제 오늘 생긴 전봇대도 아닌데, 적어도 이삼십 년은 족히 되었을 텐데, 하필이면 오늘 내 눈에 띄었다. 서럽고 슬픈 날. 


전봇대는 자연에는 생뚱맞은 구조물이지만, 사람 사는 데에는 꼭 필요한 문명이다. 강의 준비하다가 갑자기 정전 된 적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불과 5분 정도의 정전에 나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삶에는 전부일 때가 있다. 거추장스럽고 번거로운 무언가가 인생에 꼭 필요한 때가 있다. 나는 아프다. 그래서 병원도 가고 약도 먹는다. 서럽고 슬픈 일이라 했는데, 실은 병원도 약도 아무 소용 없는 사람도 많다. 그들이 나를 보면 부럽다 소리 할 테지. 부끄러웠다. 


인생에는 언제나 전봇대 같은 생뚱맞은 무언가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위기, 시련, 고난, 역경, 실패, 좌절, 절망, 분노, 시기, 질투 등 외부 환경이나 불편한 감정 등이 매 순간 우리를 방해한다. 하늘과 나무만 있으면 좋겠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봇대와 전깃줄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훼방 놓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봇대와 전깃줄이지만 우리 삶에 그것들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란 점이다. 전기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거칠고 험한 환경과 상황들,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들. 이 모든 것들도 우리의 성장과 변화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다. 꽃길만으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수록 강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삶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결합이다. 기쁨과 슬픔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늘 함께 한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따라오고, 슬픔에 젖으면 기뻐할 일이 생긴다. 환희와 고통, 성공과 실패, 좌절과 용기, 절망과 희망. 양 극단에 서 있는 이들 요소가 겹치고 되풀이 되어 인생을 만든다. 


성공했을 때 세상 다 가진 줄 알았다. 실패했을 때 인생 끝나는 줄 알았다.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오늘도 멀쩡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성공은 나를 자만하게 했고 실패는 나를 절망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일 생겼다고 방방 뛸 것도 없고, 나쁜 일 생겼다고 의기소침 무너질 일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 삶일 뿐.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나'란 존재는 건재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삶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마음속 파도는 조금씩 잔잔해진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작가의 이전글 가치를 만드는 힘, "인내심과 희소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