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용기
한 때 저의 과거를 수치와 모멸이라고 정의한 때가 있었습니다. 사업 실패로 전과자 파산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저 자신이 부끄러웠고, 앞으로 어디서 누굴 만나도 당당하게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개 푹 숙인 채 어디 막노동 현장에 가서 이름 석 자도 밝히지 않고 살아야겠다 다짐했었지요.
사람은 누구나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릴 적 친족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있고, 엄마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훔친 사람도 있고, 친구를 따돌렸거나 따돌림 당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상대적인 크기와 정도는 다르겠지만, 각자가 품고 있는 감정의 정도는 비슷할 거라고 짐작합니다.
문제는, 상처와 아픔이 과거에 발생한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전과자 파산자라는 꼬리표가 자꾸만 떠올라 한 걸음도 나아가질 못했습니다. 자신감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할까 두려워서 그냥 포기하는 게 낫겠다 판단한 적도 많습니다.
한 번 실패한 사람은 영원히 실패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걸까요? 한 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낙인 찍힌 채 살아야 마땅한 걸까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얼굴 떳떳하게 들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멀쩡하게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시련과 고난을 만나 무너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럴 때 주인공은 주로 잘못된 판단과 선택과 결정을 합니다. 인생이 휘청거립니다. 하지만, 내면의 변화를 통해 성장을 거듭하고, 결국은 새로운 삶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실수나 잘못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는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매일 매 순간 실수와 잘못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기 때문에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고 박수를 보내는 것이지요.
네, 맞습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마땅합니다. 아무리 큰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계속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히 '실수하고 잘못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소중한 인생을 낙인 하나로 망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과거 실수나 잘못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잘못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숨기고 감추고 피한다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거든요. 흔히 '가슴에 묻어둔다'라고 표현하는데요. 그것은 불행을 자처하는 길입니다. 솔직하게 드러내고 마주해야 합니다. 반성할 건 반성하고, 눈물 흘린 건 눈물 흘리고, 차곡차곡 정리하여 "내 아픔은 이런 것이다!" 딱 정의해야 합니다.
둘째,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흐지부지 대충 뭉개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제가 감옥살이 견딜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결단 덕분이었습니다. 지난 상처와 아픔을 파헤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일을 마주하고 결단 내리는 시간 꼭 가져야 합니다.
셋째, 실수나 잘못을 제대로 정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일 겪지 않도록 도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실수는 남 도우면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고요. 내 잘못은 다른 사람 도우면서 죄값 치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인생에 도움 주는 밑거름으로 활용할 때, 비로소 내 실수와 잘못은 '배움과 깨달음'으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넷째, 앞으로 나아가되 죽는 날까지 겸손한 태도로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만난다 하더라도 지난 실수와 잘못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으로 피해 입은 사람 있을 수도 있고요. 건방 떨지 말고 겸손한 태도로 평생 배우고 성장하며, 다른 사람 돕고 살겠다는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용서하고 품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랬듯이,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 겪었듯이,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고통 겪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수치와 모멸 경험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자기 삶을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다. 나를 용서해야 다른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나 자신도 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다시 들춰내 정돈하고 재해석하고 배움과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용기가 새로운 삶을 만들어냅니다.
글 쓰고 책 출간하려는 이들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지난 시간 아픔과 상처와 실수와 잘못을 굳이 다시 꺼내 헤집고 공개할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다시 시비 붙거나 그들 가슴을 또 아프게 할 필요가 있는가.
강요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선택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지요. 우리가 과거 상처와 아픔을 쓰는 이유, 실수와 잘못을 글로 쓰는 이유는 다시 들춰내 헤집자는 게 아닙니다. 돕자는 거지요. 내 실수를 통해 다른 사람들 실수를 막는 겁니다. 내 잘못을 통해 다른 사람들 잘못을 막는 겁니다. 내 상처와 아픔을 통해 다른 사람들 가슴을 위로하는 겁니다. 글쓰기는 돕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낼 만한 일인 거지요.
세상 어떤 애비가 전과자 파산자란 사실을 책에다 써서 아들 인생에 악영향을 미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제 이야기를 세상에 전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글쓰기의 힘을 깨닫고 시련과 고통을 견디는 힘 가지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타인을 돕는 행위 덕분에 아들은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픔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건 어렵고 복잡한 일이지요. 그 동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또 참았겠습니까. 꾹꾹 눌러 자기 안에서만 고통 느꼈던 그 이야기들을, 이제는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시길 바랍니다.
조롱과 멸시가 아니라 응원과 격려를 받게 될 겁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살아낼 힘 얻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련과 고난은 그저 아파하라고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 돕는 순간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글쓰기의 본질이자 우리가 써야 하는 이유라고 저는 믿습니다.
루이비통 가방을 샀다는 이야기, 정치인이 구속 되었다는 이야기, 연예인이 이혼했다는 이야기 따위도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가치롭고 숭고한 이야기가 바로 '내 삶의 경험'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