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즈음에 이르러
청바지와 목티를 좋아한다. 회사 다닐 적에는 어쩔 수 없이 양복을 입었지만, 그 외에는 공식적인 자리, 강의할 때, 친구들 만날 때 등 청바지 입을 때가 많았다. 여름에는 목티 입기가 힘들어서 일반 셔츠를 입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거울 보면서 어색하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난 5월부터 넉 달간 신경과 척추에 이상이 생겨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 겪었다. 이후로 청바지 입을 때마다 골반이 조이고 엉덩이가 불편해서 곤혹스러웠다. 11월 잠실 사인회 때는 도저히 청바지를 입을 수 없어서 집에 있던 등산용 바지를 꺼내 입고 갔다.
그래도 한 조직의 대표가 많은 사람 만나러 가는 공식적인 자리에 등산용 바지를 입고 가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 않냐고, 아내가 계속 말렸다. 예의도 체면도 중요하지만, 당장 입을 만한 바지가 마땅찮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뉴코아 아울렛 정장 코너에 가서 바지 두 벌과 셔츠 한 장을 구입했다. 평생 처음 입어 보는 바지.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면바지도 아니고 골덴바지도 아니고 그냥 중년 남자가 입는 '편안한 바지'이다.
드레스룸에서 바지를 갈아입고 나와 거울에 비춰 보는데, 도무지 '나' 같지가 않았다. 판매원은 시종일관 잘 어울린다 하였다. 이리저리 비춰 보다가 제자리에 앉아 보기도 하였는데, 청바지에 비해 어찌나 편하고 부드러운지 무슨 이런 바지가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구입한 바지에 잘 어울린다는 셔츠도 한 장 입어 보았다. 칼라가 있고 단추도 세 개씩이나 달려 있다. 진한 베이지색에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또한 한 번도 입어 보지 않은 종류의 셔츠였다. 바지랑 세트로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함께 구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 나이 오십이 넘었다. 청바지를 입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청바지 하나만 고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중년 남자가 입을 만한 옷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연스러운 차림을 갖추는 것도 비즈니스 기본 아니겠는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머리는 늘 짧게 잘랐고, 청바지에 목티 걸치면 그만이었고, 가방은 클수록 좋았으며, 신발은 편하면 충분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외출할 때면 늘 차림에 대해 잔소리를 하곤 했었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아직도 반대한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인식하는 것이 외모이자 차림이란 사실에는 어느 정도 마음을 열었다. 비싼 브랜드로 치장하자는 게 아니다. 때와 장소에 맞는 단정한 차림을 갖추는 것도 사회생활 기본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직도 한 번씩 뒷목과 어깨와 가슴이 결리고 저릿하다. 허리와 골반과 다리가 시큰거리기도 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기가 휙 지나가는 느낌도 종종 있다. 나이 오십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제는 나이에 맞는 차림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새로 산 바지와 셔츠를 입어 보니 제법 잘 어울린다. 무엇보다 골반과 엉덩이가 편안하다. 아이처럼 기분 좋다. 새 옷 사는 기분이 이런 것인데, 오랜만에 느껴 본다.
당장 입고 나가고 싶은데 어디 갈 데가 마땅찮다. 오늘 밤 문장수업 할 때 입을까. 집에서 5분 거리 나가는데 새 옷을 입자니 머슥하고. 약속을 잡아야 하나. 아니면 그냥 집에서 입고 돌아다닐까. 잘 때 입고 잘까.
흰 머리가 수북하고, 이마와 눈가에 주름이 자글하고, 배는 나오고 다리는 가늘고, 힘은 점점 떨어진다. 마음은 초등학생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간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