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과 훈련, 그리고 반복
백지를 마주할 때마다 머리가 새하얗게 멈춰버렸습니다. 평소 책 읽을 때나 산책할 때, 누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는 '무엇을 쓰면 되겠다' 아이디어 떠오르는 경우 많은데요. 막상 글을 쓰려고만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질 않고, 빈 종이가 저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겨우 용기를 내 몇 줄 쓰고 나면, 이런 게 무슨 글이 되고 책이 되겠나 싶어 종이를 구겨버리곤 했었지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저는 실제로 글을 쓴 시간보다 답답해 하면서 한숨을 쉬거나 고민만 많이 하는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겠는데, A4용지 2매를 써야 한다니! 글을 써야겠다 생각할 때마다 그 엄청난(?) 분량에 기가 질렸습니다. 엄두조차 내질 못했지요. 글 쓰는 게 두려웠고, 쓸수록 불안했으며, 어떻게든 미루고 피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매일 무조건 일정한 분량 채우기'였습니다.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던지고, 내 글쓰기의 유일한 목적은 분량을 채우는 거라고 저 자신을 세뇌했습니다.
책에서 읽은 모든 종류의 글쓰기 방법을 무시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해서 어떤 삶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목적 의식조차도 다 내려놓았습니다. 저한테 필요한 건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였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감정이나 판단이나 분석이나 평가를 없애야만 했습니다.
굳이 시간을 따질 것도 없이, 매일 매 순간 노트와 펜을 곁에 두고 끄적였습니다. 생각 나는 대로 마구 적으면서 분량을 채워 나갔지요. 그 시절 노트를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보관중입니다. 차마 읽어 볼 수 없을 정도의 글이지만, 그런 형편없는 글을 수도 없이 쓴 덕분에 저는 지금 글쓰기 코치로서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잘 써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는다면, 무엇이 우리가 글 쓰는 걸 막을 수 있을까요. 글 쓰고 책 출간해서 독자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만 한다는 부담을 벗어던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초보 작가가 글을 쓸 때, 가장 방해가 되는 두 가지가 바로 잘 쓰고 싶다는 강박과 독자 평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잘 쓰고 싶지만 잘 써지지 않으니 괴롭고 힘든 것이고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불편한 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불안하고 두려우니까 자꾸만 글쓰기를 미루게 되는 겁니다.
모든 강박과 불안함을 무조건 내려놓겠다 작정한다 해서 그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에라 모르겠다' 정신이 필요한데요. 양적 불안을 없애는 것이 왜 필요하며, 어떻게 해야 마구 쓸 수 있는가에 대해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첫째, 평생 한 번뿐인 초보 작가의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게 당연합니다. 어떤 일을 처음으로 시작할 때는 누구나 어설프고 불완전합니다. 그런 자기 모습에 당당할 수 있어야 실력 향상도 가능한 것이지요.
둘째, 양적 확장이 질적 수준의 전환을 가져옵니다. 책만 많이 읽는다고 해서 글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설계하고 계획하기만 한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 느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글쓰기 공부는 반드시 '쓰는 행위'와 병행해야만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생각을 잘 정돈해야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나중 일이고요. 처음에는 무조건 많이 써야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기억과 묵음 감정과 가치관이 쏟아져 나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을 파악해야 진짜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이죠.
넷째, 제발 부탁인데, '돈 되는 글쓰기' 따위의 말에 현혹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글쓰기'와 '돈 되는 글쓰기'는 전혀 다른 장르입니다. 분야가 다릅니다. '글쓰기'는 삶의 의미와 보람과 가치를 찾게 해주는 도구이고요. '돈 되는 글쓰기'는 그저 돈만 쳐다보는 신기루입니다.
다섯째, 어제 쓴 글도 다시 보지 말고 내일 쓸 글도 미뤄 짐작하지 말고 그저 오늘 쓰는 한 편의 글에만 몰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인생과 닮았다 합니다. 지나간 글에 미련 갖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글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 글만 씁니다.
매일 일정한 분량을 채우는 연습이 먼저라고 강조하는 저의 말을 듣고, 무조건 글을 쓰겠다 결심한 사람들은 제게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대체 이런 형편없는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의미가 뭐죠?"
평가 받는 대상으로서의 글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문장력 떨어지고 구성력 아예 없는 글이라 하더라도 "내 안에서 진짜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 엄마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빼냈던 '나'를 무시하고 잊고 사는 사람과 그런 '나'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해도 불행한 인생 살아가는 사람들 특징이 바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탓이지요.
양적 확산이 질적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독서라는 비장의 무기를 갖춰야 합니다. 초보 작가는 자신이 쓴 글이 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찾기 힘들거든요. 그럴 때,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춘 기성 작가의 문장을 체득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체득'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책을 꾸준히 읽다 보면 그 속에 담긴 문장들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결국 자기 글을 쓸 때 손끝을 타고 다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많이 방황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괴로웠다."라고 쓰지만, 나중에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매일 일정한 분량의 글을 쓰고, 한 페이지라도 문장 독서를 꾸준히 하면, 오래지 않아 일정 수준 이상의 글을 쓸 수가 있습니다. 자전거를 배우는 데에도 요령이 있고, 수영을 배우는 데에도 기술이 있으며, 골프를 배우는 데에도 공식이 있습니다. 글쓰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그런 비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매일 꾸준히 연습하고 훈련하고 반복하는 사람만이 탄탄한 실력 갖추게 되는 것이지요.
조급한 마음 내려놓고, 오늘 한 편의 글을 쓰고 한 편의 글을 읽는 고요한 양적 확장의 시간 가지길 바랍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