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텅 빈 남자
살다 보면 누군가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 마음을 내 뜻대로 돌릴 수도 없고, 시간을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 상처만 키워가는 경우 허다하지요. 이럴 땐 책 읽고 글 쓰는 게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상처 받으면 그 서운함과 고통 이루 다 말로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인생 다 그런 거야"라고 대수롭지 않은 조언만 하지요. 정작 내 가슴은 찢어집니다.
책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얀 종이는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줍니다. 독서와 글쓰기는 함부로 조언하지도 않고, 내 상처가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만히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게 해 주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사람 마음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예전에 누군가 묻더군요. "사랑이 뭐라도 생각하세요?"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상'이라도 답했습니다. 제게 질문했던 사람은 크게 실망한 듯 말했습니다. "사랑이 허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네요."
살아 보면 압니다. 영원한 사랑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죠. 제가 이렇게 말하면 세상과 인생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겁니다. 묻고 싶습니다. 혹시, 영원한 사랑을 경험한 적 있냐고요.
저는 없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 있습니다만, 그 마음 오래 가지 못한 채 식어버렸고요. 누군가 저를 열렬히 사랑한 적 있지만, 그 사랑 또한 오래 가지 못한 채 돌아섰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제가 겪은 사랑은 모두 일시적이었고 가식이었으며 이기적이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 마음속에 가득 차 있어야 할 감정이 사랑인데, 제 가슴은 이리 텅 비어 있으니 참으로 고약하고 답답한 심정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감성도 있고, 사랑이 있어야 눈물도 있으며, 사랑이 있어야 안아줄 수 있는 그릇도 만들 텐데 말이죠.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랑이 어떤 감정인가를 떠나서, 어쨌든 사랑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낭만과 로맨스를 품고 살아갈 테니까요. 그들은 여전히 달콤한 말과 은은한 눈빛을 글에 담을 겁니다. 글도 말랑말랑할 것이고요.
제가 사랑을 믿지 못하는 건, 제가 먼저 사랑을 주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껏 사랑하며 살았더라면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저 살아가는 데에만 몰입하다 보니 사랑이란 감정 따위 사치라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인생 절반을 넘기고 나서야 사랑 타령을 하고 있으니 안타깝고 안됐습니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토막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합니다. 여자도 남자를 사랑합니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만을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여자는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길 원합니다. 남자가 그토록 싫다 해도, 여자는 왜 그렇게 자기를 구속하느냐며 토라집니다.
문제는, 남자가 여자에게 자기만을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여자의 사랑이 확 식어버렸다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가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게 싫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여자는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매력 없다는 말을 던지고는 헤어지고 끝납니다.
유치 찬란한 별 것 아닌 드라마이지만, 저는 두 주인공을 보면서 다른 어떤 근사한 영화보다 현실에 가까운 드라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자의 마음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자의 마음은 진정한 사랑일까요?
그런 것 말고도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 있겠지요. 글쎄요. 현실에서 마주한 진정한 사랑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사랑이란 단어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그럴 듯하고 아름다운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영원히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그냥 그 정도입니다.
처음엔 저도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마땅찮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길 고대했었지요. 어쩌다 우연히 저만 사랑을 놓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십 년 넘게 살면서 진정한 사랑을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으니 저는 참 불쌍한 인간 아닌가 싶네요.
말이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위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툭하면 "사랑은 변하는 거야. 장담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그냥 사랑한다 한 마디만 하면 될 것을 굳이 저렇게 정색을 하고 다큐를 찍으니 실제로 사랑이 깨지고 만 것이지요.
영원한 사랑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노력과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표현하고,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눈빛을 마주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야 제법 오래 갈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지금 한창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냥 오십대 아저씨의 동심 파괴라고 여겨주세요. 사실 저도 제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길 바라면서 살았거든요.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