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무게 사이
이제 누가 전과자라고 하면 과자 이름처럼 느껴집니다. 회식 자리에서 감빵 이야기를 아무나 제 눈치 보지 않고 합니다. 저는 감옥 이야기만 나오면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 우스갯소리를 하고야 맙니다. 제가 겪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을 다른 사람들이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저의 인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했고, 징하게 고통스러웠으며, 그 과정에서 배우고 익힌 바를 글에 담습니다. 그 누구도 제가 겪은 시련을 되풀이하도록 그냥 두고 싶지 않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하고, 어깨를 살포시 안으며 위로하기도 합니다.
제 삶을 지켜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웃음이고요. 다른 하나는 무게입니다. 감옥에서도 웃었고 막노동 현장에서도 웃었습니다. 모두가 너무 힘들다며 인상 팍팍 쓰고 있는 가운데 저만 웃었지요.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여기가 지금 장난인 것 같냐?"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감옥과 막노동 현장이 장난 같아서 웃었던 게 아닙니다. 웃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웃은 거지요. 인상 쓰고 욕하고 성질 부리면 뭐가 달라집니까? 현실이 최악인데 내 마음과 표정까지 최악이면 대체 뭘 믿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가끔은 진지해질 필요도 있습니다. 웃음이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 앞에서 함부로 웃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허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사람 앞에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분위기 파악도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지금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한 적 있습니다. 밝고 쾌활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여자는 제가 화 나고 속상할 때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웃기만 했습니다.
그녀가 다른 남자랑 차를 마시고 맥주도 같이 마셨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폭발했던 적 있는데요. 제가 진지하게 우리 관계를 따지고 들었는데도, 나를 사랑하는 거 맞냐고 물었는데도, 그녀는 그저 웃으며 장난만 계속 치려 했습니다. 그때 생각했지요. 아, 이 여자와는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없겠구나.
상대의 마음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똑같은 분노라 하더라도 웃음이 통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운 빠져 있을 때 웃음이 극효약이 될 수도 있지만, 속상하고 화가 나 있을 때 웃음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사랑합니다. 제가 많이 웃고, 또 남을 웃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밤새도록 웃길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웃는다고 해서 저와 타인의 삶을 우습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 저는 누구보다 진지한 사랑과 삶을 원하고 바랍니다. 그런 진지함 속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웃음을 자처하는 것뿐이지요.
최근 우리 사회 정치와 경제 실정을 보면, 차마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웃을 일이 없다는 것만큼 괴롭고 불행한 인생은 없지요. 이럴 때일수록 웃음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자꾸 웃어야 웃을 일이 생깁니다. 다만,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고 더 나은 사회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시 또 진지 모드로 바뀌어야 합니다. 웃음과 무게 사이 균형을 잘 잡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믿습니다.
굳이 한 말씀 덧붙이자면, 아무래도 우리는 무게 잡는 때가 더 많고 웃지 않는 사람도 더 많은 듯합니다. 웃음과 무게 둘 다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더 많이 웃기 위해 노력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즐겁고 유쾌해야 무게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강의 시간에 모니터 앞에서 기다리며 입장하는 수강생들 표정을 지켜보곤 하는데요. 마치 방금 장례식장에 다녀온 사람들 같습니다. 누구 하나 환하게 웃지 않습니다. 왜 웃지 않냐고 물어 보면, 웃을 일이 뭐가 있냐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표정이 굳어 있고 사뭇 진지하며 오히려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습성으로 굳어진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웃으면 비웃는다 생각하는 경향도 있거든요. 마음껏 웃으며 환한 표정을 짓는 것이 삶을 좋아지게 만드는 동력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웃어야 합니다. 상대가 아프고 힘들 때는 함께 아파하고 위로 건넬 수 있는 진지함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인생을 잘 사는 거겠지요.
시도 때도 웃으면서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것도 경우가 아니고요. 얼마든지 웃어도 되는 자리에서 시종일관 무게만 잡으며 진지한 표정 짓는 사람도 꼴불견입니다.
마음껏 웃으며 살되, 마음 아파 힘들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함께 진지해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