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쓴 글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빈 화면에 커서가 깜빡거립니다. 손은 키보드 위에 있지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수십 개의 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건 너무 평범해', '이건 너무 오글거려', '이건 임팩트가 없어'.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도 첫 문장을 쓰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글을 쓰기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으려다 아예 쓰지 못하는 것이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첫 책을 쓸 때, 첫 문장에 여러 날을 소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문장이 책 전체의 톤을 결정할 텐데', '이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수십 개의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습니다.
일주일 후 지쳐서 아무렇게나 쓴 문장으로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글이 술술 나왔습니다. 책을 다 쓰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니, 그 '아무렇게나 쓴 문장'이 제법 괜찮게 느껴졌습니다. 몇 차례 수정하고 다듬은 후 그대로 책을 출간했지요.
완벽한 첫 문장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첫 문장은 완성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겁니다. 책을 다 쓰고 나서 고치고 다듬으면 썩 괜찮은 첫 문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문장을 쓰려는 시도는 아직 가 보지도 않은 여행의 완벽한 사진을 미리 찍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첫 문장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려는 초보 작가가 많습니다. 첫 문장이 훌륭해야 책도 훌륭하다고 믿는 거지요. 실제로 명작이라 불리는 책들의 첫 문장을 살펴보면 의외로 평범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기억에 남는 멋진 첫 문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문장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쓰인 게 아닙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퇴고를 거쳐 탄생한 것이죠.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을 39번 다시 썼다고 합니다. 첫 시도부터 완벽했던 게 아니라, 38번의 서툰 시도 끝에 39번째에 만족스러운 문장을 찾은 겁니다. 38번의 시도가 없었다면 39번째 문장도 없었을 테지요. 서툰 시작, 그리고 수없이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첫 문장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완벽주의는 글쓰기의 가장 큰 적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순간, 시작할 수 없게 됩니다. 완벽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완벽한 문장이 완성될 때까지 미루고, 완벽한 구조가 잡힐 때까지 망설입니다. '완벽한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불완전한 시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초고는 원래 엉망입니다. 모든 작가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앤 라모트는 자신의 책 '쓰기의 최전선'에서 '형편없는 초고(Shitty First Draft)'라는 표현을 씁니다. 첫 번째 초고는 형편없어도 괜찮다는 것, 아니 형편없어야 정상이라는 말이죠. 초고의 목적은 완벽함이 아니라 존재입니다. 일단 쓴 글이 있어야 고칠 수 있습니다. 쓰지 않은 글은 고칠 수도 없습니다.
위대한 작가들이 처음부터 완성된 문장을 쓴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요. 영감이 떠올라 단숨에 명문을 완성한다고 믿습니다. 실제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어설픈 문장을 씁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문단을 만듭니다. 지루한 전개를 늘어놓습니다. 대신, 그렇게 쓴 글을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습니다.
글쓰기는 두 단계로 나뉩니다. 쓰기와 고치기. 많은 사람이 이 두 단계를 동시에 하려다 실패합니다. 쓰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 두 작업은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을 필요로 합니다. 쓸 때는 판단하지 않고 흘러가듯 써야 하고, 고칠 때는 냉정하게 분석하며 다듬어야 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면 둘 다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첫 문장을 쓸 때는 '일단 쓰기'가 중요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쓰는 단계니까요. 나중에 고치면 됩니다. 중요한 건 백지를 벗어나는 과정입니다. 한 문장이라도 써놓으면 다음이 나옵니다. 두 번째 문장, 세 번째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렇게 한 문단이 되고, 한 페이지가 되고, 한 챕터가 됩니다.
제가 가르친 643명 출간 작가들도 같은 패턴을 보였습니다. 첫 수업에서는 한 문장도 쓰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완벽한 문장을 쓸 자신이 없다고 합니다. '일단 아무거나 써 보세요'라는 말을 듣고는 실제로 아무 문장이나 쓰기 시작했습니다. 서툰 첫 문장에서 시작해서 결국 한 권의 책을 완성했습니다. 시작이 서툴렀다는 이유로 책이 서툴러지지는 않습니다. 서툰 시작이 있었기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중요한 건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는 겁니다. 첫 발이 완벽하게 아름다워야 완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첫 발은 그저 출발선을 벗어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달리다 보면 리듬이 생기고, 호흡이 맞춰지고, 페이스가 잡힙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툰 시작을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면 글이 훨씬 쉬워집니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흐릅니다. 막혔던 말들이 풀립니다. 재미있어집니다. 완벽을 추구할 때 글쓰기는 고통이지만, 서툰 시작을 받아들일 때 글쓰기는 놀이가 됩니다.
첫 책을 쓸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마음가짐 문제였습니다. '내가 쓴 이 문장이 책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볼 텐데, 이렇게 서툴러도 되나?'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쓰고, 또 쓰고, 열한 권을 쓴 지금은 압니다. 초고의 서툰 문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독자들이 보는 건 수십 번 고쳐진 최종본일 뿐이라는 사실을요.
첫 문장은 그냥 써도 됩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도 괜찮고,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도 괜찮습니다. '글을 쓰려니 막막하다'로 시작해도 됩니다. 심지어 '뭘 쓸지 모르겠다'로 시작해도 됩니다. 중요한 건 커서를 움직여 백지를 채우는 일입니다. 한 글자, 한 단어, 한 문장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책을 다 쓰고 나면 처음 쓴 첫 문장은 대부분 사라집니다. 전체 구조가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시작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첫 문장을 새로 쓰거나 중간에 있던 문장을 앞으로 가져옵니다. 결국 처음에 고민하며 쓴 그 첫 문장은 최종본에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첫 문장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시작입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쓰면 됩니다. 완벽한 문장을 하나 쓰는 것보다, 서툰 문장을 열 개 쓰는 게 낫습니다. 열 개의 서툰 문장은 고쳐서 다섯 개의 괜찮은 문장이 될 수 있지만, 쓰지 않은 완벽한 문장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고를 쓸 때는 내면의 편집자를 잠재워야 합니다. '이 문장 이상한데?', '이 표현 유치한데?', '이거 누가 읽겠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일단 무시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 목소리를 들을 때가 아닙니다. 나중에 퇴고할 때 그 목소리를 활용하면 됩니다. 지금은 그저 흘러가듯 쓰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잘 쓰면 나중에 고칠 게 적지 않나요?'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쓰려고 하면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전체를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보다는 빠르게 초고를 완성하고 전체 그림을 본 다음 고치는 게 훨씬 효율적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계획한 내용과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초반에 공들여 쓴 부분을 통째로 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 초고는 빠르게 쓰는 게 맞습니다. 어차피 바뀔 내용에 완벽을 추구할 필요는 없겠지요.
서툰 시작의 또 다른 장점은 심리적 부담을 줄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서툰 문장을 쓰는 날이야'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어차피 나중에 고칠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쓰면 손이 가볍게 움직입니다. '오늘은 완벽한 첫 문장을 써야 해'라고 생각하면 손가락이 굳습니다. 부담과 압박이 글쓰기는 막습니다.
많은 작가가 '쓰레기 시간(Garbage Time)'을 활용합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판단 없이 무조건 쓰는 시간입니다. 좋든 나쁘든,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씁니다. 타이머를 10분 맞춰놓고 멈추지 않고 씁니다. 그렇게 쓴 글의 90%는 쓸모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10%에서 보석 같은 문장을 발견합니다.
서툰 시작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용기, 실패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용기, 지저분한 과정을 거치는 용기입니다. 용기가 있어야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완벽주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됩니다.
첫 문장은 연습 문장입니다. 진짜 첫 문장은 나중에 찾으면 됩니다. 지금 쓰는 건 그저 시작을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워밍업 같은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첫 문장에 대한 부담이 확 줄어듭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책을 다 쓰고 나면 처음 쓴 첫 문장은 '연습'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진짜 첫 문장은 책의 중간쯤에서 발견됩니다. 혹은 마지막 문장이 첫 문장으로 오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짜 시작점이 드러납니다.
완벽한 첫 문장은 없습니다. 서툰 시작만 있을 뿐입니다. 서툰 시작들이 모여서 한 권의 책이 됩니다. 수백 명 작가를 배출하면서 제가 확신하게 된 사실입니다. 책을 완성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첫 문장을 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서툴더라도 시작했다는 사실이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완벽한 첫 문장을 기다리지 말고 그냥 써야 합니다. 어색해도, 촌스러워도, 유치해도 괜찮습니다. 그 서툰 문장이 책을 만듭니다.
첫 문장은 완벽할 필요 없습니다.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쓴 문장은 고칠 수 있지만, 쓰지 않은 문장은 영원히 다듬을 수 없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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