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인생
어느 순간부터 의미와 가치를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죠. 내가 지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살아낸 오늘이 가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벅차고 뿌듯합니다. 시간과 일에 쫓겨 휩쓸리듯 살았던 시절에는 제 마음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돈을 이야기합니다. 성공을 말하고요. 저도 돈을 좋아하고, 제법 많이 벌어야 질 높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에세이와 자기계발서 중에 굳이 고르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기계발서를 선택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무엇이 옳다 그르다 따지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행하다면 그 돈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매일 화가 나고 스트레스 받고 찝찝하고 짜증나고 속상하다면, 그래서 이게 지금 뭐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면, 글쎄요,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허탈하고 공허하지 않을까요.
10년도 더 전에, 돈을 많이 벌고 떵떵거리며 살았던 적 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도 장만했지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이었는데, 저는 그 시절 단 한 순간도 편안하거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도 없고,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도 아닌데, 저는 매일 매 순간 '결핍'에 시달렸습니다. 더 가져야 하고, 더 벌어야 하고, 더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일주일 내내 일만 했습니다. 아내와 어린 아들 데리고 어디 나들이 한 번 다녀온 적 없었고요. 명절에도 대구에 계신 부모님댁에 방문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매일 일을 했고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 당하지 않을 유일한 길이라 여겼지요.
겉은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인생이었습니다. 거센 강물에 한 번 휩쓸리고 나니까 멈출 수가 없더라고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인생. 저는 불행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심각한 고민을 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못할 거라면 글을 쓰며 사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게다가 저는 글을 쓸 줄도 몰랐거든요.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을 매일 쓰는 것이 남은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사실이 안타깝고 초라했습니다.
자기위로라고 해야 할까요. 글쓰기 철학과 가치관을 가진 작가들의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습니다. 억지로라도 저의 글 쓰는 인생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제법 그럴 듯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글쓰기 철학과 가치관에 대한 책을 읽어도, 제 현실과 마주할 때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당장 마음이 불편하고 괴로운데, 글을 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이런 생각만 계속 들었습니다.
삶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은 채 계속 글을 썼습니다. 어떤 이유나 목적 없이도 뭔가 계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토록 많은 대가들이 글쓰기에 뭔가 있다고 하니 한 번 믿어 보기로 한 것이지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도 했고요.
글을 쓰려 하니 마땅한 주제나 소재가 필요했습니다. 쫄딱 말아먹고 망했다는 얘기로 계속 우려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은 또 뭘 쓰나. 내일은 또 뭘 쓰나. 이거 은근히 스트레스 심하고 골치아픈 문제였습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것부터 적었습니다. 밥상이 보이면 밥상부터 적고, 그 다음에 밥상과 관련된 저의 기억을 소환했지요. 처음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소한 일화까지 떠올랐습니다. 그 후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전부 다 일단 적기로 했습니다. 저의 글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적다 보니, 생각보다 눈에 들어오는 게 많더라고요. 이런 물건과 자연과 풍경이 모두 원래부터 내 앞에 있었던 것들인가 싶었지요. 세상이 반경 백 미터쯤 넓어진 것 같았습니다.
들리는 소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새소리, 차 소리, 비행기 소리, 사람들 말 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 청각이 예민하지 않은데도 별 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소음'이 아니라 '소리'였지요. 내 주변에 이토록 많은 '소리'가 존재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먼저 적고, 그와 관련된 저의 경험을 떠올려 글을 썼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보이고 들리는 것'이 '보고 듣는 것'으로 바뀌더군요. 내가 주체가 되니까 글 쓰는 맛이 더 좋아졌습니다.
행위의 반복은 그 일을 잘 하게 만들어준다 하지요. 나름 오랜 시간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이제는 제 마음 속 이야기를 어느 정도 논리적으로 펼쳐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래도래만 칠 때보다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할 정도가 되니까 피아노 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진 것이지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글을 쓰며 살아온 지난 10년 동안, 제 마음을 가득 채웠던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분노가 썩 많이 줄었다는 사실을요. 이걸 철학적으로 또는 가치관으로 해석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좋지 않은 제 마음이 뒤로 물러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매일 글을 쓸 작정입니다. 두 가지 사실을 알았거든요. 첫째, 못 쓰는 사람이 글을 많이 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고요. 둘째, 우리 모두에게는 글을 쓸 권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장이라도 쓴 날에는, 내가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구나 싶어서 가슴 뿌듯합니다. 글 쓰는 삶이란 이런 거지요. 잘 쓰고 못 쓰고 따지고 채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나와 내 삶을 잘 보고 듣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