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다물고, 정신 똑바로 차리기
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사촌 동생이 내려왔습니다. 아내와 조카 모두 함께 왔네요. 일 년에 두 번, 명절에만 얼굴을 봅니다. 반갑고 기쁩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살아가는 이야기 나눕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좋아하시는 모습 보면 흐뭇합니다.
거실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눌 때는 내 안으로 파고들 만한 시간은 가질 수가 없구나. 상대가 한 마디를 하면, 나도 한 마디를 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이어집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서로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하지요. 어떤 주제가 정해질 때도 있고, 그저 다양한 이야기를 나오는 대로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간입니다만, 자신을 들여다보기는 힘듭니다.
예전에는 저도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요즘도 사람들 만나면 말을 많이 하는 편이죠. 그러나,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이 그것인데요. 혼자 있는 시간에는 저절로 침묵을 유지하게 됩니다. 저는 이 침묵이 참 좋습니다.
침묵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생각이 자꾸만 밖으로 뻗어가는 것입니다. 낮에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소리 등 외부 세계에 대한 생각을 주로 하게 되지요.
두 번째로는 답답함을 느끼는 단계에 이릅니다. 말을 하고 싶습니다. 표현하고 싶지요. 뭐가 됐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려고 애쓰게 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단계에서 포기합니다. 심심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루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혼자서 할 수 있는 무엇이라도 하는 단계입니다.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도 있고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그 일이 좋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비로소 생각이란 걸 하게 됩니다. 잡다한 생각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가라앉는 것이죠. 이 단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직업이나 일, 관계 등에 집중하는 얕은 생각 단계가 먼저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까 하는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침묵의 끝에서는 결국 자신과 삶에 대한 생각과 마주하게 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지만, 침묵을 오래 유지하다 보면 누구나 '자신과 만나게' 되는 것이죠.
작가와 강연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면 지금에 이를 수 없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그렇게 글을 쓰는 제 삶을 타인과 나누겠다고 시작한 일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는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감옥이라는 참혹한 곳에 가서야 침묵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다를 떨 수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침묵이야말로 저 자신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소통의 세상입니다. 소통은 중요합니다. 허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소통에만 몰입하다 보면 자칫 자신을 잃을 위험도 있습니다. 자기 삶은 엉망이면서 남 가르치려 드는 인간이 많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지적하기 전에 자기 삶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사실은 세 살 먹은 애도 아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보다는 남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지요. 그러다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탓하면서 화를 내거나 속상해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에너지 낭비입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속상해 했던 모든 에너지를 싹 다 모아서 자기 계발에 활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 모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했을 겁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를 향해 이래라 저래라 가르치는 글만 쓰려고 하지 말고, 화살표를 자신에게 돌려 성찰하는 글을 쓰는 것이 작가 본인과 독자 모두에게 더 도움될 겁니다.
저는 작가와 강연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인데, 때로 겸손하지 못한 글을 쓰기도 하고, 제가 옳다고 믿는 내용에 대해 무리할 정도로 강요한 적도 많습니다. 독자와 청중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제 삶이 조금씩 반듯해지는 게 낫겠지요.
침묵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입은 다물고 결과물은 많이 내는, 그래서 '말로 설명하기'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작가와 강연가가 되려 합니다.
소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중심 잡고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침묵입니다. 입을 다물면, 세상이 보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