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까지
누구 생일도, 특별한 날도 아닌데 식탁 위에 춘천닭갈비가 풍성하게 놓였다.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의 입은 귀에 걸렸고, 아버지만 싱긋이 웃고 계신다.
한 때 유행처럼 번져 곳곳에 춘천닭갈비 식당이 즐비했었다. 지금은 동네 어귀 딱 한 군데만 영업 중이다. 아버지는 아마 그 곳에서 사 오셨을 터다.
뼈를 발라내고 한입 크기로 자른 닭갈비. 양배추와 당근, 무우, 당면, 파 등 각종 채소가 벌건 양념과 어우러졌다. 한 통에 3인분씩, 두 통 사 오셨다. 뚜껑을 열자 닭갈비 특유의 진한 향이 물씬 풍겼다. 군침이 돌았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 맛 데이트를 즐긴 적 있다. 감자탕, 스파게티, 돼지갈비, 피자, 떡볶이, 해물탕...... 소문 만큼 맛이 있어서 기분 좋게 먹은 날도 많았고, 생각보다 별로라서 허탕을 친 적도 없지 않았다.
춘천닭갈비는 웬만한 식당에서도 별 불만 없을 정도였다. 조금씩 그 맛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간을 진하게 해서 먹는 대구 사람 입맛에 대부분 맞춤이었다. 특히, 다 먹은 후에 식당 아주머니가 볶아주는 밥은 그야말로 대미를 장식할 만했다.
저녁 식탁 위에 오른 닭갈비를 먹으며 모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 더욱 맛이 있었다.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아동 지키미'를 선발한다. 초등학교 주변을 순찰하며 학교 폭력 예방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울러,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일거리와 수입을 창출해주는 일환이기도 하다.
경쟁이 치열하다. 선발 조건도 까다롭다. 일단 나이가 65세 이상 되어야 하고, 시력부터 기초 체력까지 아무 이상 없어야 한다. 신체 검사도 하고 면접도 본다. 합격하는 사람보다 떨어지는 사람 훨씬 많다고 하니, 노인들한테 인기 많은 일거리임은 틀림없다.
"내가 기분이 좋아서, 집에 오는 길에 사가지고 왔다."
오늘은 '아동 지키미' 선발 결과 발표되는 날이었다. 아버지 연세 올해 여든 둘. 여덟 살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닭갈비 사 들고 오신 사연을 말씀하신다.
눈만 뜨면 또 다음 날. 지극히 당연했던 사실이 어느 순간 특별하게 바뀐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은 인생을 소중하게 만들었다.
'아동 지키미'는 수당이 그리 많지 않다. 하는 일도 대단치 않다. 젊은 사람 눈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버지한테는 도전이었고, 용기였고, 결실이었다.
아무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날. 아버지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골목 어귀 닭갈비 식당에 들렀을 터다. 3인분씩 두 통을 포장해 달라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순간,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했을까. 웬 닭갈비에요 라며 온가족 반겼을 때 저절로 웃음이 났으리라.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날이 특별한 날로 바뀌었다. 의미와 가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 손으로 조각하고 빚는 것이었다.
'아동 지키미'에 선발된 것은 단순히 일거리를 잡았다는 의미 이상이다. 그것은, 아직 젊고, 일할 수 있고, 내 손으로 돈 벌 수 있고, 아이들 지킬 수 있고, 시력도 괜찮고, 무릎도 정상이고, 매일 돌아다니며 동네를 순찰할 수 있다는 존재로서의 인정이며 인생 값어치의 증명이었다.
날 더울 때 무리하지 마시고 길 건널 때 조심하세요 라는 인사 대신, 아버지 덕분에 동네 애들과 부모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겠네요 책임감 실어드렸다. 내심 염려 가득했던 어머니도 아무 말씀 없이 그냥 웃고 계셨다. 역시 우리 할아버지는 대단해! 멋지다는 말 아끼지 않은 아들 녀석도 기특하다.
특별한 날보다 평범한 날이 많다. 평범한 날보다 힘들고 지쳐 고개 숙이는 날이 더 많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았으니 여기까지 온 게 아닌다. 대견하고 훌륭하다. 그래서 인생이다.
작은 날이 있기에 큰 날이 있고, 힘든 날 있으니 웃는 날도 있게 마련. 대수롭지 않은 일들에 소중함과 사랑 깃들여 웃음 가득한 저녁 식탁 만들 수 있다면, 뭐 그리 어렵지 않은 일 아니겠는가.
인생 노을 진하게 물드는 순간까지 힘을 다하려는 아버지 모습. 그대로 배워 뼈에 심는다. 특별한 날과 평범한 날, 그 사이 어딘가 즈음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