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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Sep 13. 2023

끝내주는 생각은 루틴에서 나온다

떠나지 마라


글 쓰겠다며 바다가 보이는 호텔방을 예약하고 4~5일씩 다녀오는 사람 숱하게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어느 정도의 원고를 손에 쥐고 오는 사람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때로 절에 들어갔다 오는 사람도 봤고, 글쓰기 워크숍에 참여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결과는 같았습니다. 왜 다녀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라도 정리하고 돌아온 건가 싶어 대화를 나눠 보면, 가기 전보다 심경이 더 복잡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글 쓰겠다며 호기롭게 며칠씩 시간을 냈는데, 아무런 결과물이 없으니 더 초조하고 조급해진 것이죠. 그냥 집에서 쉬었으면 몸이라도 편했을 텐데 말입니다.


학창시절 독서실에 다녔습니다. 그 곳에 가면 뭔가 공부를 좀 더 많이 할 것 같고, 집중도 더 잘 될 것 같았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지요. 친구들이 가니까, 저도 간 겁니다. 독서실에 가서 밤 12시까지,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밤 공기 마시며 산책도 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하고 있다고 생각만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더 초조해지고, 결국 성적은 엉망이었지요. 부모님이 한결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일 독서실에 가는데, 왜 성적이 이 모양이냐."


독서실과 성적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방과 집필은 아무 관련 없습니다. 고즈넉한 절과 글쓰기 워크숍은 내 원고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상황이나 장소, 환경이나 조건은 나의 글쓰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그런 것들이 방해 요소가 맞다면, 조앤 롤링이나 다산 정약용은 한 줄도 쓰지 못했어야 마땅합니다.


사실을 왜곡하는 자기 합리화는 이제 멈춰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쓰지 못했다는 말이 작가로서 얼마나 수치스럽고, 스스로를 못났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소리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쓰지 못했을 때, 그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와 변명을 댄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저 웃고 넘어갈 뿐이죠.


자신감, 자존감, 행복 등 이런 말에 집착하는 것처럼 살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만 매일 하고 다니는 셈입니다. 차라리 그냥 "쓰고 싶은 마음과 쓰기 싫은 마음이 뒤섞여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편이 훨씬 멋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또 다음에 어떤 걸 하고, 오후와 저녁으로 이어져,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라는 시간을 온전히 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루틴이라 하지요. 매일 반복하는 겁니다. 지겹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요. 그것은 '매일이 똑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면 매일이 지겨울 리 없고, 또 그렇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 멀리 외딴 곳에 가야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루틴과 그 사이사이 자신이 만든 리추얼이 섞일 때 최고의 창의적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죠.


비행기 타고 바닷가 호텔방 가는 데 3시간. 짐 싸서 돌아오는 데 3시간. 6시간이면 글 세 편은 쓸 수 있습니다. 몸도 덜 피곤하고요. 해냈다는 자신감도 생길 것이고. 왔다 갔다 돈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편안하게, 우직하게, 묵묵하게, 아무 설레발 떨지 말고. 책상 앞에 앉아 "소리 없이" 쓰는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세상이 고요해야 하고, 글감이 쉴 새 없이 떠올라야 하며, 노트북이나 기타 도구들도 완벽해야 하고, 아이들도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남편이나 아내도 나를 이해해주며 응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야만 글을 술술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지난 10년 동안 매일 글을 썼습니다. 566명이나 되는 작가를 배출하기도 했고요. 그 모든 과정에서 "글을 쓸 만한 완벽한 조건"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저도 그랬고, 566명 모두 똑같았습니다. 항상 문제가 있었지요. 불편하고 못마땅하고 걸림이 되는 무슨 일이 늘 일어났습니다. 저와 그들 모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 것뿐입니다.


SNS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중독 되어 살아가다 보니, 내 인생만 초라하고 부족하게 여겨집니다. 사실은, 세상 누구도 완벽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들 부족하고 모자라고 불편합니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때와 장소는,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그 곳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쓸 수 있다면, 언제 어디에 있어도 쓸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쓸 수 없다면, 바다가 보이는 고요한 어느 곳에서도 쓸 수가 없을 겁니다. 문제는 항상 내 안에 있는데, 우리는 자꾸만 해결책을 밖에서 찾으려 합니다.


문제를 밖에서 찾으려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완벽주의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글을 쓰면 뭔가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한 절간에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글을 쓰면 그럴 듯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지요. 여이에서 쓰나 거기에서 쓰나 나의 글쓰기 실력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일단 쓰고, 조금씩 다듬고 고치면 충분히 괜찮은 글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때와 장소가 좋아서 글 잘 썼다는 사람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습니다. 다들 "힘들고 어렵게" 썼다고 하는데도, 그 글이 참 좋고 와닿습니다. 때와 장소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증명이지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는 루틴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생활 습관입니다. 자꾸만 '특별한' 무언가를 찾지 말고, 자신이 보내고 있는 하루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가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끝내주는 생각은 항상 루틴에서 비롯됩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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