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근원
나의 역사 속에서 불안의 근원을 더듬어 보려면 어느 구역까지 탐문을 해야 할까. 개인의 역사를 찬찬히 탐문하는 작업은 현실의 문제와 연결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개인의 역사를 더듬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덧없는 일이며 간혹 건강을 해치기까지하는 위험한 작업이다. 지금에 와서 지나온 특정한 사건이나 등장 인물을 탓하는 일이나 스스로의 해묵은 감정을 양분 삼아 연출된 비극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앉혀두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때때로 개인의 비극을 강화시켜 균형감각을 잃게 만들곤 한다.
여러가지 위험에도 불구하고 불안에 대한 탐문을 위해 개인의 역사를 더듬어 볼 가치는 있다. 과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신중한 태도와 정밀한 붓질로 조심조심 실체를 발굴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거치다 보면 '왜 태어났는가',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실존의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던 시기로 계속해서 수렴하곤 한다. 나의 경우는 불온했던 이전의 감정들을 마주하며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감정들이 '불안' 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을 처음 인지했다. 구체적으로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으면서부터였다. 일상에서 겪는 기저의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떨림을 어떤 '실존적 불안'으로 정의될 수있다는 것과 그것이 현대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는 보편적 감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 개인의 역사 또한 그러한 보편적 사실 구조 속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감정을 처음 접한 나는 처음 초콜릿을 맛 본 어린아이가 으레 그러하듯 이 불안이라는 감정을 허겁지겁 탐구하고 좇아댔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라는 책까지 탐독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배고픔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주인공 요조를 연민하고 공명하면서 슬퍼하거나 스스로를 위안하곤 했다.
어린시절은 늘 불안으로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도, 나서서 발표를 할 때도, 시험지를 써내려가거나 높이 뜬 공을 발로 트래핑할 때에도, 주먹다툼을 할 때에도, 집에 돌아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예민하고 무거운 공기를 인내할 때에도 늘 불안했다. 불안을 고쳐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또한 불안하지 않은 척 애쓰느라 몸과 마음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던 기억과 장면들은 학창시절 내내 척추 깊숙히 박혀 있다. 그 시절에는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객관화하고 평균으로 회귀시키는 일을 반복하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회복 체계도 아직은 없었다. 연륜이나 여유를 갖추기 전 연약하고 가소성이 높은 시기였기에 불안을 '나'와 분리하여 응시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것을 동력 삼아 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일이 잦았고, 반복되었고, 결국에는 어떤 기저의 메커니즘이 되어갔다.
아래 글은 '배고픔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인간실격의 화자인 요조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담아 '인간 실격' 특유의 문체를 기억하며 나의 어린시절 척추 깊숙히 박혀 있던 장면들을 꺼내어 재구성하고 각색하면서 개인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인지한 불안의 근원에 대해 탐문한 글이다. 입밖으로 꺼냈을 때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어린시절의 세세한 불안은 영원한 개인의 고통과 맞닿아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누구의 말씀처럼 아마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고유한 재료가 되었으리라.
나는 배고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것은 내가 의식주의 어려움을 모르는 넉넉한 집에서 자랐다는 시건방진 의미가 아니라, 어리석은 나로서는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먹고 싶으냐', 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아무것도 먹고 싶어 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엇을 먹고 싶은지 떠올리는 데 일종의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특히나 고통스러운 시간은 우리 집의 식사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세 끼, 정해진 양을, 괴상한 배합으로 섭취해야 하는' 그 의식은 나에게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기말고사의 악몽 같은 것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몇 가지 방책은 준비해두었습니다. 이를테면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대답.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꺼낸 방책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면서 그것은 어떤 진지한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식사시간을 잘 모면하는 일에 능숙해지면서 나는 단 것을 즐기지 않는 이의 특유의 향 같은 것들이 필요해졌습니다. 건강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가진 아이. 말하자면 오늘의 모임에서는 어떤 향수를 뿌려야 적절하게 이 파티에 어울려 즐기는 척을 할 수 있을지를, 무사히 모면해 나갈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위해 나를 고쳐내는 일을 집요하게 반복했습니다. 정말로 배가 고픈지를 탐구하는 시간을 별로 가지지는 못했기 때문에 나는 배고픔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덕분에 나는 엉뚱하게도 무언가를 고쳐내는 일에 능숙해졌습니다. 정말로 고쳐야 하는 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 날은 또 무엇을 모면하기 위해 태권도 학원을 갔었는지, 생일 선물은 정말로 무엇을 갖고 싶었는지, 혹은 어째서 또 시험성적을 잘 받기 위해 밤새워 영어단어를 암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든 선명한 것들이 불분명했던 날, 흐릿한 나의 어린 시절에도 재료를 골라 특정한 형태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 것을 고치는 일, 집요하게 고쳐내는 일을 통해 기어코 상황을 모면하는 일에 유난히 능숙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많은 재료들 중 정말로 제가 좋아했던 유일한 재료는 하얀 도화지였습니다. 하얀 도화지에 선, 면, 공간으로 형태를 긋고 거기에 색을 채우고 또 덧칠해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에게는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머릿 속으로 생각한 대상, 관념을 눈 앞에 세밀하게 구현해내기 위해 하얀 도화지를 '고치고' 또 '고쳐서' 생각한 대상으로 '고쳐내곤' 했습니다. 입꼬리가 조금 더 끝에 가서 늘어져야해. 지금보다 쪼ㅡ금만 더. 아니다. 너무 늘어졌어. 다시. 그렇지 딱 이 정도. 다른 것을 고쳐내는 일은 고통스러웠습니다. 전날 밤마다 내일 있을 의식은 또 어떻게 모면할 지 준비하다 보면 새벽에 되어버리는 일이 허다했지만 하얀 도화지를 고쳐내는 일은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꿈은 '화가'라고 적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체육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또 어떤 날에는 멋진 밴드의 보컬이 되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장래희망 란을 채워야 하는 공식적인 날이 오면 곧장 '화가'를 써 넣고는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어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리에 앉으면 그림이, 하얀 도화지가 다 고쳐질 때까지는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그 곳에 가만히 머물러도 좋았습니다. 합의 되지 않는 언어들이 폭력적으로 떠나니는 공간을 견딜 필요도 없었고, 옳고 그른 것을 간단히 해체하고 편의대로 재조립하는 커리큘럼도 꼭 따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수학이나 영어시간에 그렇게 잘 머물렀다면 아마 수학능력시험 전날 밤을 지새우고 시험장에서 잠이 드는 일 따위는 없었을텐데요. 매일같이 약을 먹어야 하는 일 또한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그 것 자체인 시간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고치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약간의 형태력을 타고난 덕에 학교에서 월례행사로 열리던 크로키 대회에서 1등을 거의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얀 도화지를 올려두고서 책상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을 붓펜으로 집요하게, 짧은 시간동안 잘 고쳐내면 커다란 상패와 함께 더 좋은 붓펜, 스케치북 따위 상품들을 선물로 주고는 했습니다. 의아하고도 무척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로 불리기 시작한 것, 예고 진학을 추진하려는 미술선생님의 전화가 매년마다 걸려오는 것은. '쟤는 꿈이 화가래'. 미리 준비해 둔 방책 하나 없이 벌어진 상황에 나는 몹시도 당황했지만 침착한 척 하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습니다. 불안함을 들키는 것은 나 같은 가짜들에게는 특히나 위험한 일입니다.
하얀 도화지와 검은 붓펜 두 가지만으로 책상 위에 앉은 사람을 빠르게, 잘 고쳐내면 되었던 크로키 대회가 색까지 덧칠해야 하는 그림 그리기 대회로 바뀐 것은 더욱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색을 고르는 일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알맞게 대답하는 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나로서는 고칠 수 없는 수준의 복잡한 일이었습니다. '나 같은 가짜는 여기까지구나.' 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타고난 승부욕도, 챔피언으로서의 긍지도 없었던 저는 결국 1등을 놓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없을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화가'라는 공식적 표명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림을 그리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부터 장래희망에 더 이상 '화가' 라고 적는 일은 없었습니다.
언젠가였습니다. 전직 축구선수라는 사람이 학교에 찾아 와서는 며칠이고 교무실을 오가더니 학교에 축구부를 만들었습니다. 몇 가지 테스트를 거친 후 나도 그 축구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축구부에 가입하는 것이 좋은 방책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한 그 날은 내심 무척 기뻤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예전부터 축구는 성별이 남성인 사람들과 어울리기에 더 없이 좋은 수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은 인간들 밖을 겉돌아도 눈감아 주겠지. 군대에서 자살했던 선임병이 그렇게나 축구를 잘했던, 매일 같이 함께 어울려 성공적으로 공을 차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안타깝지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어릴 적부터 그것이 좋은 방책이라는 것을 알았던 나는 중학교에 들어서자 부랴부랴 공을 차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늦었지만 다행히 고치는 일에는 도가 튼 내가 체육시간에 좋은 점수를 받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허리를 써서 공을 멀리 차내는 일도, 디딤발을 고쳐서 슛을 골대 안의 원하는 곳으로 꽂는 일도, 고깔 사이로 세밀하게 드리블을 해내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사람들과 무리지어 그럴싸한 모습으로 축구를 하게 된 건 축구부에 가입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영어학원이 끝나고 함께 몇 번 축구를 하면서 우연히 가까워진 사람의 권유로 토요일 밤마다 학교 앞 공원에 모여 공을 차기 시작했습니다. 멤버는 매번 바뀌었습니다. 조용한 편이었던 나는 시끌벅적했던 속에서도 거의 매주 함께 공을 찼고, 반 년 쯤 지날 무렵 출신학교의 구분 없이 팀을 하나 꾸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공을 차고 나면 다 함께 목욕탕을 갔습니다. 다른 친구를 만나러, 혹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러 먼저 빠져나가는 녀석들이 내심 아쉬웠지만 목욕탕을 꼭 가지는 않아도 되었습니다. 나는 목욕 후의 식사시간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떡볶이와 김밥, 그리고 맥도날드에서 오레오 한 컵. 매번 같은 메뉴를 먹어도 괜찮았습니다. 먹지 않아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습니다. 몇 시에 먹어도 상관없었구요. 위급한 상황을 모면해야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조심스러웠지만 '나는 축구를 좋아해요.' 라고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전직 축구선수가 학교를 찾아온 후 그들 중 같은 학교를 다녔던 몇몇과 함께 테스트를 거쳐 학교 공식 축구부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전직 축구선수라는 사람은 코치를 역할했습니다. 축구부에서의 일은 괴상하고 복잡했습니다. 매일 같이 비쩍 마른 남자들이 둥글게 어울려서 내키지 않는 '헛헛' 기합소리를 내며 일정 구간을 뜀박질해야 했고, 복잡한 동선으로 축구공이 아닌 농구공을 자주 드리블해야 했으며, 그 외에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많은 훈련을 소화하고 규칙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속으로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욕하면서도 연습을 따라 가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속으로는 가슴이 철렁 하고는 했습니다. 나는 티내려 하지 않은 채 꼼꼼하게 노력했습니다. 성실함을 들키는 일 또한 나 같은 가짜에게는 위험한 일이니까요. 가능한한 능글 맞은 흉내를 잘 해내야 했습니다. 규칙을 잘 지키지도 않고, 틈만 나면 농땡이를 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는 내심 혀를 끌끌 차곤 했습니다.
축구부 시합은 토요일에 열리곤 했고, 토요일에 공원에 나가는 일이 어쩔 수 없이 줄어 들었습니다. 몇 번 열리지 않았던 축구부 시합에서는 매번 후보 신세였습니다. 여러 번 기복이 심해서 주전멤버로는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짜로서 특별히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잘 고칠 수 있을지를 필사적으로 고민했습니다. 진짜들은 열심히 고치지 않아도, 많은 규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골을 잘만 넣고, 멋진 수비를 해내고, 일정한 수준의 플레이를 해내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고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고민했습니다.
반 년 정도 흐른 뒤 나는 축구를 그만두었습니다. 토요일마다 공원을 나가는 일도 그만두었구요. 성인이 된 후 사람들이 "축구하세요?" 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아뇨, 예전에는 분명히 자주 했었는데 지금은 그만두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어째서요? 어떤 중대한 일이 있으셨나요?"라고 추궁하듯 묻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만 글쎼요. 특별한 역사적 의의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도 잘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마 안타깝지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캄캄한 방 안에 누워 그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꼬르륵' 소리가 계속해서 방 안에 울려퍼지고 있기 무엇을 먹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나는 배고픔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좋은 방책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이따금씩 사람들에게 조용히, 흐릿한 초상화를 그려주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