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을 찾아가는 여정
'나다움'에 골몰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다움'에 골몰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동기부여다. 내 삶에 대해 나는 얼마나 진정성 있고 일치된 태도를 갖출 수 있느냐의 문제. 얼마나 나의 삶이 스스로에게 가치있고 떳떳하며 또한 생동감 있는가의 문제이자 그래서 얼마나 꾸준히 힘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불행히도 원하지 않는 웃음을 팔거나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는 하루를 보낸 뒤 등뒤에서 별도의 즐거움과 재미를 찾아먹는 유연하고도 약은 태도가 나에게는 없다. 부단히 노력해봤지만 이제는 기질의 문제라는 것에 수긍한다. 쫓기듯 열심히 살아갈수록 무언가가 훼손되어가는 듯한, 살아있지만 죽어가는 듯한 기분을 견디는 평균적인 일이 요령없는 나에게는 고통이다.
둘째는 '경쟁력' 혹은 '생존'이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 일자리, 높은 연봉과 처우, 어디에서나 인정 받는 역량과 직무 기술을 쌓기 위해 커리큘럼대로 한 해 두 해 노력할수록 평균 혹은 표준의 무엇이 되어 가는 동시에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중요한 무언가가 훼손되어간다. 스스로의 고유한 경쟁력은 줄어가고 대체제로서의 경쟁력이 늘어가면서 점점 훌륭한 조립품으로서 대체가능한 존재가 되어간다. 남은 미래를 고려했을 때 회사나 기업, 혹은 특정한 문화적 규칙 등의 시스템이 없는 상황이 분명히 도래할 터인데 그러한 환경에서 나는 얼마나 고유하고 '나다운' 경쟁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
나는 스타트업 창업멤버로 경력을 시작해서 UX디자이너, 데이터분석가, PO로 10년을 일했다. 사업의 본질은 고객에게 좋은 가치를 일정한 품질로 제공함으로써 신뢰를 얻어 그것을 화폐로 등가교환하는 것이다.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공급 과잉사회에서 수요에게 선택받기 위해 유효한 문제해결력과 차별적인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고객에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다. 결과만을 성취하기 위해 보편적인 성공방정식이나 성장공식을 베껴다 쓰다 보면 본질을 놓치는 경우, 이를테면 고객의 신뢰보다 숫자 자체에 집착하는 일이 잦아진다. 둘을 깨끗하게 구별해내는 일은 너무나 복잡해서 때로는 그저 결과론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몇 년간은 J커브를 위시한 투자나 몇 가지 그럴듯한 지표를 추구하는 양적 성장과 형식적 성장 사이의 모호한 지점을 추구하는 업계의 흐름과 그 중심에 있는 스스로에게 신물이 났다. 그런 종류의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실무자로 역할을 하다보면 내가 추구하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거시적인 흐름에 휩쓸리기 십상다. '나다움', 개인의 가치가 쉽게 훼손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무언가가 주객전도 되는 현상 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고, 우치다 타쓰루가 말한 것처럼 '더 이상 나다움에 대한 추구가 하류지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다소 유난한 인물로서 나는 이를 견디는 일이 무척 버거웠다.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관성대로 살아가는, 성실함 속에서 의구심을 견뎌내는 일상이 누적되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성장을 위해 어쩌면 나는 타인의 역사를 빌려 쓴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써내려가려 했는지 모른다. 나의 이야기가 완벽하지 않을 때면 기다렸다는 듯이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소위 잘나가는 무리의 주변인들과 슬쩍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으시대면서 그것을 폄하했고, 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위한 초조한 근거로 삼았다. 그러면 마치 내가 손가락질 받지 않아도 되는, 성공이 보장된 규칙대로 안전하게 살아가는 고고한 무리 속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나는 내가 행해온 역사들이 뾰족하게 두드러지거나 대단하지 않으면 스스로 애매한 것이라고 정의내리곤 했다. 뛰어난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든 내가 성취한 것들은 대부분 애매한 범위에 놓이기 쉽다. 혹은 애매하다는 판단의 기준은 과연 절대적인가? 모든 애매한 것들은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한 포장지로 이름붙일 순 없더라도 스스로가 최선을 다했다면 분명한 나만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친 나의 자산이다. 그것을 쉽게 폄하하면서 나의 입으로 남의 말을 해대며 스스로를 채찍질해대는 습관의 누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것들에 집착하는 결과를 낳았다.
안타깝게도 성공은 운이다. 자유의지를 포기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개인이 거시적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것을 인정하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잘 구별해내고, 에너지를 통제가능한 작은 실천에 집중하는 것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환경이나 외재적 가치, 혹은 단순 결과물에 집착하고 그것을 움켜쥐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반대로 내가 가진 자산들을 잘 융합해서 발휘하는 방식으로는 노력과 실험을 해보지 않게끔 만들었다. 평면적인 판단 기준을 쉽게 받아들여 시행착오를 실패로 오인하며 나의 자산을 인정하고 가꾸는 관점과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았다. 자신의 애매함을 인정하는 순간 절대적인 무언가에게 인정받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에 눈이 멀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외적 성장 혹은 양적 성장에 집중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다움'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허울만 좋은 껍데기 성장에 얻어 걸려 온 재물과 평판이 쌓여갈수록 내부로부터 허물어져 가는 일상에 대해 무감각해져갔다. 평범한 어느 하루, 논밭이 잘 보이는 외지의 카페에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맥북을 탁탁 두들기다가 소리 없이 붕괴가 찾아왔다. 공황장애였다.
성공은 운의 문제라는 사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에는 표준의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참고할만한 사실은 이 곳이 수요와 공급을 대전제로 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 '나다움' 또한 보편적인 정답을 좇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 즉 채용시장의 매물이나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 등 공급자로서 차별적인 가치를 영리하게 발견해내고 대체불가능한 가치와 수요자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실질적인 경쟁력이라는 점이다.
'나'는 한 순간이 아닌 누적의 존재다. 오래된 행동과 습관들의 누적으로서 현재의 특정한 한 순간으로 귀결한다. 그 역사를 묶어 '나'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복기해보자면 애매한 나의 역사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때로는 '오늘 고생했구나.', '이런 점들은 가치가 있겠구나.', '즐거웠구나.' 그 자산을 스스로가 알아주는 것이 스스로의 자산이나 내재적 가치, 나다움 따위와 연결될 수 있는 좋은 시작점의 순간이었을텐데. 나의 역사를 존중하는 순간을 반복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스스로를 믿고 자신이 구축한 평가 기준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성장의 방식을 나는 두려워하고 겁냈던 것 같다. 아마도 외부의, 타인의 평가 기준을 고민없이 정답지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것들에 집착하는 일은 내 삶의 키를 타인에게 넘겨주는 일과 다름없다. 유일하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완벽하지 않은 나의 역사를 그대로 사랑하는 일'이다. 그 곳이 출발지점이다. 모든 일에는, 모든 이에게는 매력적인 순간이 있으며 고유한 가치가 있다. 납작하고 평면적인 잣대로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고 수급 관점에서 스스로의 차별성을 가꾸는 시선과 손길이 없다면, 고유한 나의 언어로 나의 역사를 빚어내는 과정을 생략하고 존중과 사랑 없이 정해진 규칙만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간다면 그 이야기는 언젠가는 조용히 붕괴된다. 각오하지 않은 시스템의 부재를 맞닥뜨리는 일이 찾아온다. 나다움의 비밀은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