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번 주에 온다고?
맞은편 상대방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정적이 지나치게 길게 느껴질 때쯤 다시 현우는 말을 꺼냈다.
-온다는 거야, 안 온다는 거야. 나 회의 들어가야 해.
현우는 끝내 대답 없는 상대방을 탓하듯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회의장을 향해 걸었다. 몇 년을 만났어도 다정하게 굴 수 없었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답답함을 줄였어야 했지만 바쁜 이 시점에 답답하게 행동하는 연주에게도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나중에 시간이 날 때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끝난 후 자리에 돌아온 지 1시간쯤 지났을 무렵 문자 하나가 울렸다. 연주였다.
[ 나, 할 말 있어.]
현우는 연주의 문자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기분에 답장을 하려고 할 때 다시 문자가 울렸다.
[ 지금 현우 씨 집이야. 일 끝나면 바로 와.]
연주의 낯선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다음 문자에서 알게 되었다. 한 번도 약속 없이 찾아온 적이 없었던 연주였다. 대학생부터 만나 오기 시작하였고 마음이 꽤 맞는 편이라 몇 년 동안 잘 맞춰 지내왔었다. 서로에게 불편한 행동은 하지 않기로 무언의 약속이 되어있었던 둘의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문자는 생소할 따름이었고 현우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문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주에 온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오늘 당장 와있다는 말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 아닐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연주의 행동에 대해서 예측이 전혀 되지 않았고 서둘러 퇴근시간이 되기를 초조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퇴근길에는 장대비가 내렸다. 6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된 오늘은 장마의 기간에 들어섰다. 퇴근길은 꽉 막혔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주를 생각하며 차를 몰았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교통체증에 답답하였지만 방법이 없었다. 연주에게 조금 늦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었고 연주가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알 수 있는 점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요새 까칠하게 군 것 때문일까, 만나자마자 신경 쓰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붙잡고 빌어야 할까,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고 시간이 흘러 어느새 집에 도착하였다.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연주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거실의 주광색 조명이 집의 분위기를 더 차분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현우는 조심스레 연주에게 다가가며 말하였다.
-무슨 일 있어?
연주는 현우를 올려다보며 말없이 옆에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집 창문이 열려있어 거실에는 빗소리로 가득 채웠고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나, 임신했어. 현우 씨 아이 가졌어.
연주의 말에 현우는 선전포고라도 당한 듯 귀가 얼얼해졌다.
-다시 말해봐 뭐라고?
-아이 가졌고 한국에서 안 키울 거야, 나 외국 가서 낳고 싶어. 거기서 살 거고.
연주의 단호함에 현우는 연주를 마주 보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연주의 손을 잡았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였는지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거짓이기를 바랐지만 연주의 눈에는 조금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연주의 태도에 자신의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과 과거까지 총동원하여 잘못한 일이 있는지 자신에게 되물어보았다. 잘못한 점들이 얼핏 지나갔지만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그렇다 하더라도 연주가 이런 농담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고 진실이라고 하여도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나는?
현우의 말에 연주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계획에는 현우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연주가 바라본 현우는 커리어를 쌓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는 사람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서로에게 불편함을 덜기 위한 배려를 한다고 하였지만 결국 연주에게는 빈 공간을 만든 채로 지속된 관계로 밖에 와닿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연주는 현우의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아빠로서의 자격을 묻기보다 혼자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린 판단이었을 뿐이기도 하였다.
-나 아빠 되는 거잖아. 나도 아빠잖아.
현우는 복잡한 감정으로 울먹거리며 말을 하였고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목소리에 당황스러웠지만 말을 이어나갔다.
-하, 내가 아무리 너한테 요새 신경을 못 썼고, 아니 전부터 못 썼더라도 이럴 수 없잖아. 연주야, 오늘 일도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어. 우리 한 두해 만난 거 아니고 무려 7년 만났어. 연주야, 다시 생각해 봐. 미안해, 그래도 대화할 수 있었던 거 아냐?
현우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며 연주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가 어느 범죄의 피해자처럼,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낸 게 아니라는 것처럼, 모든 걸 다 널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쳐다보았다.
연주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현우의 이런 반응은 생각할 수 없었다. 평상시의 현우는 냉철하였고 연주의 고민에, 말들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더라도 평정심을 지킬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컸다.
연주는 자신을 붙잡고 있는 현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 사람, 이렇게 절절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되짚어보아도 생각나는 날이 없었다. 나를 외면하거나, 잊거나, 우선순위에 들지 않게 두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아니 저 사람의 아이를 위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여움이 생겼다. 불행하게도, 연주는 현우를 버릴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현우가 필요하였다.
잠시 망설이던 연주는 현우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이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이의 아빠라는 이유와 떠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고 현우 말처럼 7년의 시간을 하루아침에 끊어낼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낳지 않고 싶었을 뿐이지, 현우와 헤어질 생각은 더 고민할 시간이 있어야만 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마음가짐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필요하였다. 현우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연주는 생각하였다.
현우는 연주가 자신을 쳐다보며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자, 다행히 안도감을 느꼈다. 평소 무심하게 대했던 일들이 감정이 밀려왔고 미안함으로 마음을 채웠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연주의 마음과 표정은 신경 쓰지 못하였다. 연주 역시도 현우의 행동에 별 미련 없이 대하였다. 어쩌면 서로 필요에 의해서 지속될 수밖에 없는 관계라고 이미 여겼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렀다. 연주는 여전히 제 할 일을 하며 보냈다. 아이의 용품들을 자신의 자취방에 꾸몄고 현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혼자 하다 보면 나중에도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현우에게는 병원이나, 그 외 것들, 사소한 것들에만 신경 쓰게 만들었다. 아이의 있는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7년 동안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에 대한 답이 되기를 바랐다. 현우는 연주의 인생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7년을 되묻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지난 세월 동안 충분히 답이 되었다. 끊임없이 자신과 현우에 대한 감정들을 물었고 결국엔 묻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간이 지나는 것 밖에 없었다. 연주는 현우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행동을 하였다.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현우에게 맞춰 산다고 생각하였고 내가 먼저 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곳에서 빠져나오자 현실이 보였다. 현우에게 느낀 가여움은 아직 정답을 찾지 못하였다. 왜 가여웠는지 알 수 없었다. 현우가 가여웠던 걸까, 아니면 연주 자신이 가여웠던 걸까. 이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급속도로 가여워졌다. 대체 사랑이 뭐라고. 나를 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