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 기간이 올해는 특히 길었고, 앞으로도 길 예정이라고 뉴스에서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현우는 회사에서 온종일 연주만을 생각하였다. 연주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 아이를 생각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누군가를 생각하였다. 연주와 7년 동안 만나면서 미래를 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희망찬 미래만을 생각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제 자신이 안정이 되고 여유가 생기면 연주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그 시간이 미뤄지고 기약이 없어졌을 때쯤에는 이미 저한테도 연주는 신경 밖이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존재였고 없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함부로 대했을 수도 있다.
연주가 어떤 심정으로 나에게 말했을지 그날처럼 통보를 했던 것은 짐작이 갔다. 더 나은 방법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따랐다.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나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연주를 그렇게 대한만큼 연주 또한, 나를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시간 속에서 서로를 갉아먹으며 지냈더라도 잘 몰랐을 것이라고 지금은 이런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이 생각이 나중에 후회가 따른다고 하여도 연주에 대한 마음까지 살필 여력이 없었다. 아이, 아이만을 생각하면 벅찬 감정이 생겼다. 나를 닮은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에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태어날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벌써부터 아이에게 부모의 감정과 사랑을 느꼈다. 좋은 남편보다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처럼 무의식의 생각이 깨어난 기분이 들었다.
연주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이 있냐고 문자를 남겼고 연주는 병원이나 간단한 것들을 말해주었다. 병원,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회사는 야근이며, 업무며 되도록이면 뺄 수 있게 되는 날 뺄 수 있도록 하였고 휴가도 최대한 맞춰서 하고 싶었다. 웃음이 나왔다. 언제 크게 웃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다고 여겼는데, 아이 때문이라도 웃음이 나왔다. 이름은 뭘로 지어야 할지, 언제쯤 태어날지 생각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어느새 어두워진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연주는 집 거실에 있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아이를 낳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나라를 검색하였다. 모아놓은 돈이 넉넉지 않았지만 잠시 동안은 머무를 수 있을 것이었다. 현우에게 외국에서 살 것이라고 소리쳤지만 평생 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을뿐더러 당장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말하였다. 지금의 생활보다는 낫겠다는 위안의 마음으로 현우가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몸이 힘든 것은 괜찮았다.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 마음이 괴로운 것보다 훨씬 나았다. 현우에게 좀 전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지만 받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신호음이 1초 이상도 되지 않을 만큼 덥석 받고는 하였다. 상대방이 기다릴 틈도 없이, 그렇게 틈을 주지 않은 채, 궁금해할 시간도 없을 만큼으로 행동하였다. 과거를 생각하면 자신도 잘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휩싸였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나 자신을 먼저 생각했더라면 이 정도 상황이 왔을까 싶었다. 자책은 할 필요 없었지만 힘이 들었다. 결국 받지 않자 현우의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숨통이 트였다.
짧은 순간에도 현우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이 연주를 힘들게 만들었다. 가만히 자신의 배를 바라보던 연주는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었다. 모든 선택들이 잘한 선택이기를 간절함이 생겼다. 아이도 우선이었지만 자신을 먼저 챙겨야 아이에게 좋은 영향이 갈 것임을 알았기에 연주는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멈췄다.
[ 너 집 언제 이사 갔어? 전화 좀 받아.]
전화하기를 포기하였던 현우에게 문자가 왔다. 전화를 받으라는 말, 단순한 말인데도 강압적으로 들리는 말 그리고 집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연주였다. 관심이 줄고 연락이 줄어들었을 때쯤 연주는 연인이었던 현우에게 이사 가는 것조차 말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느라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던 사이었다. 한 번을 끝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던 사람. 어디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났던 것에 점점 후회가 따랐다. 그럴 수 있지 와 바빠서 어쩔 수 없지, 이해하는 게 맞는 거지 하는 합리화를 하며 지내온 시간들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예전에 살던 집에 찾아와 전화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이제 와서 찾았다. 답장할 수 없었다. 끝까지 자신 밖에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현우를 다 맞출 수 없었다. 연주는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소파에 던졌다. 숨통 트이는 기분을 지속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고 혼자 있고 싶었다. 책상 앞에 앉아 얼굴을 파묻던 연주는 밖의 빗소리에 집중하였다. 장마기간이 끝나면 이 관계도 끝이 나있기를 바라며 빗소리가 투둑-투둑- 소리 나는 음을 따라 흥얼거렸다. 아직 조금도 자라나지 않은 아이에게 들리라는 듯이, 조용히 불렀다. 연주의 잔잔한 음과 빗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거실은 잠시 평화로운 기운이 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연주는 일찍 일어나 병원을 가기 위해 현우에게 문자를 남겼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움직였으면 하기에, 필요할 때만 연락하자고 마음먹었다. 그 외에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현우는 연주의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전화가 왔고 침착한 목소리로 연주에게 물었다.
-어제는 왜 전화 안 받았어?
현우의 화를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 연주는 몸이 점점 떨려왔다. 항상 수동적으로 행동했던 연주는 지금의 자신도 익숙하지 않았다. 현우의 뜻대로 하지 않으리라는 마음과 달리 몸이 덜덜 떨리며 움직였다. 연주는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춘 채 말을 이어나갔다.
-나, 병원 가야 돼. 올 거면 oo역 9번 출구 앞으로 와.
연주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현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끊었기에 건너편 너머에서 욕지거리를 하고 연주를 씹어댈지도 몰랐다. 상관이 없었다. 연주는 떨리지만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느껴졌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과 울음이 쏟아졌다. 7년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묻어두고 모른 채하며 꾹꾹 눌러 담았던 감정이 터졌다. 현우를 위해서 살았던 자신의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준 상황이었다. 고작,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은 것이라면 고작이었지만.
10분 정도 지나자, 현우의 차가 보였다. 거칠게 몰고 오는 차를 보며 연주는 웃음이 실쭉 흘러나왔다. 며칠 전에는 자신도 현우도 함께 가여웠고 지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화를 내며 달려오는 현우는 처음 보았다. 차갑고 까칠했어도 저한테 관심이 없었던 만큼, 화를 내는 경우는 보기 어려웠다. 아이 때문임을 알면서도 연주는 기뻤다.
현우는 연주 앞에 차를 빠르게 세우고 연주를 태웠다. 병원을 향하는 길에는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고 현우 혼자 화를 삭일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연주 혼자만이 웃음이 번지는 걸 막느라 참는 시간을 보냈다. 병원에 도착해서 역시도 별 일이 없었다. 검사를 받고 현우는 연주의 옆을 지켰다. 현우는 연주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아이에게 영향이 갈까 봐 말을 삼켰다. 어제 일로 화가 치밀어 올라 열이 받아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지는 것이 생각나면서도 계속 참았다.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였다. 연주의 행동은 거슬렸지만 이대로 화를 내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 또한 자신의 손해였다. 자신의 아이를 낳기까지 연주에게 맞춰주기로 하였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것처럼 굴고 싶었다. 연주는 아까 만났던 곳에서 내려달라 말하였고 현우는 곧장 내려주는 듯 보였지만 역 앞에서 도착한 후에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집 어딘지 알려주고 가.
-왜? 찾아올 이유 없어.
-왜라고? 나도 너 집 궁금해서 이러는 줄 알아? 혹시나 아이가 위험하면..
연주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현우를 쳐다보았다. 현우는 오히려 더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가려고 하였고, 연주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잠겨진 문을 열고 내렸다. 역 주변으로 지나가고 있던 자동차들의 경적에 못 이겨 현우는 자리를 벗어났다. 연주는 또 한 번 눈물이 흘러내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현우가 자신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알고 겪었으면서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까 전의 쾌재를 부르던 상황과 달리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투둑-투둑-하늘에서는 다시 비가 내렸다. 짧은 순간에 쏟아지듯 비가 내렸고 연주는 그대로 맞으며 서 있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비로 인해 같이 쓸려내려 갔다. 바닥으로,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다.